피겨의 김연아가 그랬듯 스노보드의 최가온도 새 역사를 쓰다
“시합 들어서면 떨림 사라져” 17세의 담대함이 만든 기적
(시사저널=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어릴 적 꿈은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다. "김연아 선수가 너무 인기였고, (동작 등이) 너무 예뻐 보여서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노보드를 타면서 피겨스케이팅은 잊었다. "스노보드에 완전히 빠졌기 때문"이다. 한때 그를 가르쳤던 코치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스노보드의 김연아'로 만들어주겠다고도 했다. 보드 위에 오른 지 10년. 최가온(세화여고)은 진짜 '스노보드의 김연아'가 됐다. 둘의 공통점은 얼음 위에서, 눈 위에서 겁 없이 담대하다는 것이다.

"처참한 추락이 만든 충격적인 반전" 외신들 경악
최가온은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여자 하프파이프에서 한국 선수단에 이번 대회 첫 금메달을 안겼다. 한국 선수가 스키·스노보드 종목에서 올림픽 포디움 맨 위에 선 것은 최가온이 처음이다. 김연아가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새 역사를 썼듯이 최가온 또한 한국 스키·스노보드의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미국 NBC방송이 "처참한 추락이 만든 충격적인 반전"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기적 같은 우승이었다. 최가온은 1차 시기 때 회심의 1080도(공중 세 바퀴) 회전을 시도하다가, 보드가 파이프 턱에 걸리면서 밑으로 고꾸라지며 떨어졌다. 현지 중계진조차 경기를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할 정도의 큰 추락이었다. 동계올림픽을 독점 중계한 JTBC 또한 이 추락 이후 본채널을 쇼트트랙 경기로 넘겼다. 메달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판단한 듯하다. 최가온의 경기는 JTBC 스포츠에서 이어졌다.
최가온은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들것에 실려 나가면 그대로 대회를 포기해야만 한다. 최가온은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발가락부터 힘을 주면서 서서히 발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리고, 기어이 일어서서 경기장 밖으로 절뚝이면서 걸어나갔다.
2차 시기를 앞두고 전광판에 '출전하지 않는다'는 표시가 떴다가 지워졌다. 코치진은 병원에 가자며 최가온을 설득했다. 자칫 더 큰 부상을 당할 수 있어서였다. 올림픽 전에 척추가 부러졌던 최가온이다. 하지만 최가온은 완강했다. 7세 때부터 꿈에 그리던 올림픽 무대였기 때문이다.
의지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최가온은 2차 시기에도 넘어졌다.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1·2차 시기를 합해 1위 자리(88.00점)에는 올림픽 3연패를 노리던 클로이 김(미국)이 있었다.
그리고 3차 시기. 무릎 통증을 참으며 최가온은 보드 위에 올랐고 반원통형 슬로프를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왔다. 코스 상황을 고려해 1080도 고난도 기술 대신 900도와 720도 회전을 구사하면서 마지막 착지까지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최고 난도 기술을 쓰지는 않았지만 높이를 비롯해 완성도가 높았다. 90.25점. 대역전극은 그렇게 쓰였다.
클로이 김은 마지막 3차 시기 도중 넘어지면서 더 나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비록 올림픽 3연패에는 실패했지만 클로이 김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최가온의 우승을 축하해 줬다. 사실 클로이 김 또한 한 달 전에 어깨 인대 부상을 당하면서 올림픽 출전 자체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최가온, 클로이 김 모두 이번 대회에서 인간 승리의 표본이 됐다고 하겠다.
최가온은 올림픽 우승으로 클로이 김의 기록을 또다시 지웠다. 클로이 김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때 이 종목 최연소 금메달 기록(만 17세10개월)을 세웠는데 최가온의 나이는 만 17세3개월이다. 최가온은 2023년 1월 익스트림 스포츠 이벤트 X게임에서도 최연소 기록(만 14세2개월)으로 파이프 종목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전까지 최연소 기록을 갖고 있던 이가 역시 클로이 김이었다. 클로이 김은 순위가 결정된 뒤 최가온을 껴안으며 축하했는데, 외신들이 이를 "왕관을 물려주는 순간"이라고 묘사한 이유다. 클로이 김은 이후 인터뷰에서 "내가 금메달을 땄던 그 나이에 (최)가온이가 우승하는 것을 보니 자랑스러운 엄마가 된 기분"이라고도 했다. 클로이 김은 최가온의 멘토이자 우상이고, 훈련 과정에서 여러 도움을 준 바 있다.

'김연아 키즈'들 활약하듯, 앞으로 '최가온 키즈'들 생길 것
최가온은 10대 초반부터 '스노보드 천재'로 불렸으나 종목 특성상 여러 부상이 있었다. 특히 2024년 초 스위스 락스에서 열린 월드컵에 출전했다가 훈련 중 허리를 크게 다치면서 선수 생활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척추가 부러져 스위스에서 1차 수술을 받았고, 염증이 생겨 2차로 한국에서 재수술을 받았다. 3차로 핀을 빼는 수술까지 했다. 수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한 관계자는 "그때 가온이의 엑스레이 사진을 봤는데 너무 안타까웠다. 큰 부상이라서 보통사람이라면 다시는 보드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의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때 최가온의 나이는 만 15세에 불과했다.
최가온 스스로도 멘털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최가온은 올림픽 채널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정신력이 좀 강한 것 같다"면서 "2025년 X게임 때 손목이 부러졌는데도 결승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픈 것도 덜 느껴졌다"고 했다. "경기 시작 전에 막 떨다가도 시합에 들어가는 순간 떨림이 없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가온은 7세 때부터 스노보드를 타기 시작했고, 이듬해부터 하프파이프에 도전했다. 하프파이프는 아버지 최인영씨의 꿈이기도 했다. 최가온은 "처음에는 하프파이프를 전혀 몰랐는데 아빠가 젊었을 때 타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하프파이프를 시작했다"면서 "파이프에 딱 들어갔을 때 너무 웅장하고, 타는 사람들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고 했다.
최인영씨는 딸의 잠재력을 발견한 뒤 하던 사업마저 접고 최가온의 훈련과 경기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했다. 2018년 평창 대회 때 클로이 김의 아버지 김종진씨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때 들은 조언이 '딸은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챙겨줘야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최인영씨는 늘 딸과 함께했다. "아침은 든든히 먹어야 한다"며 매일같이 요리도 해줬다. 최가온은 이런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최가온은 시상식 직후 아버지에게 금메달을 걸어줬다.
김연아가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최정상에 오른 뒤 국내 피겨에는 '김연아 키즈'가 많이 생겼다. 넘어지고, 부러지고, 쓰러져도 "스노보드 타는 저 자신이 제일 멋있어서 좋다"는 최가온을 따라 '최가온 키즈'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다만, 국내 인프라가 부족한 것은 아쉽다.
최가온은 "국내에 하프파이프 훈련을 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인데, 이마저도 시설이 완벽하지 않아 아쉽다"면서 "일본은 여름에도 훈련할 수 있는 에어매트 시설이 있는데, 한국엔 없어서 일본에서 훈련한다. 국내에서 훈련하고 싶은 마음이 큰데, 한국에도 이런 시설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최가온의 꿈이, 다른 이에게 전달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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