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몰라도 된다, 편집을 보면 옛책 보는 눈이 트인다

이훈성 2026. 2. 2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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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갔을 때 건성건성 지나치곤 하는 전시품이 고서(古書)일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국립한글박물관 전시운영과장을 역임한 저자는 고서의 본문을 읽지 않아도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역시 세종 치세기에 제작된 '월인천강지곡'은 드문 한글 고서로, 한글은 고딕체로 강조하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한자를 병기하는 선진적 편집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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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이재정 '고서의 은밀한 매력: 편집의 시각으로 옛책을 보다'
지난달 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뉴스1

박물관에 갔을 때 건성건성 지나치곤 하는 전시품이 고서(古書)일 것이다. 한자가 띄어쓰기도 없이 빼곡하고, 간혹 보이는 한글도 지금과 너무 달라 해독하기 힘들고, 종이는 누렇게 바래 너덜너덜하니, 그냥 '검은 건 글자, 아닌 건 종이'려니 하며 건너뛰곤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국립한글박물관 전시운영과장을 역임한 저자는 고서의 본문을 읽지 않아도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 책의 부제처럼 편집의 관점에서 보면 옛책에 대한 안목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

끈으로 엮는 나뭇조각을 본뜬 한자어 책(冊)의 원형이 된 삼국시대 목간, 두루마리를 거쳐 병풍처럼 접는 절첩본으로 나아간 고려시대 불경, 오늘날처럼 두 쪽씩 펼칠 수 있게 제본된 조선시대 선장본. 저자는 15개 장(3개 장은 서양 고서)에 걸쳐 고서 제작의 진화상을 당대 대표 서적을 중심으로 꼼꼼히 살핀다. 요컨대 하드웨어 측면에서 본 책의 역사, 책의 물성사(物性史)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금속활자 전문가인 저자는 책 분량의 절반가량(8개 장)을 조선시대 책 분석에 할애한다. 선장본 형식이 보편화하고 한글 창제로 식자층 너머로 책이 전파될 가능성이 열린 터라, 도서 편집의 역동적 발전상을 보여주기에 맞춤한 시대이기도 하다.

세종이 편찬을 주도한 '자치통감강목'은 사각형 테두리(광곽)로 본문 영역과 제본용 여백을 자연스레 가르고, 글자 크기를 달리해 본문 내용과 위상을 시각적으로 구분하고, 본문 보충설명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미주 대신 각주를 다는 등 선장본에 맞춤한 '명품 편집'의 본보기를 보였다. 역시 세종 치세기에 제작된 '월인천강지곡'은 드문 한글 고서로, 한글은 고딕체로 강조하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한자를 병기하는 선진적 편집을 선보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편찬한 '명의록'은 자신의 즉위를 막으려 한 권신들을 처단하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한 책이다. 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자 펴낸, 요즘으로 치면 국정 홍보 책자인 셈이다. 명의록을 전국 방방곡곡에 읽히려고 정조는 금속활자로 찍은 책자를 지방 관서에 보내 이를 목판에 새겨 대량 간행하게 하는 한편, 백성들도 읽을 수 있게끔 한글로 풀어쓴 '명의록언해'를 따로 만들어 배포했다. 이처럼 활자본을 목판본으로 만드는 걸 '번각'이라고 하는데 이 시대 서적 양산의 주요 방식이었다.

옛책에 찍힌 장서인(책도장)은 고서의 배포와 소장 이력을 보여주는 귀한 사료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연잉군 시절 부친 숙종에게 책을 하사받은 영조가 책 맨 앞 장이 아닌 그다음 장에 장서인을 찍은 데서 왕의 서자였던 그의 처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건희 컬렉션'에 있는 낡고 헤진 조선 전기 고서 '성리대전서절요'는 배접지(표지를 보강하려 덧붙인 종이)로 쓰인 이면지, 표지 뒷면이나 본문 여백에 적힌 메모 등 그 낡음으로 역사의 한구석을 훤히 비춘다. 책이 귀하디 귀해 가보처럼 여겨지던 시절을 말이다.

고서의 은밀한 매력·이재정 지음·푸른역사 발행·416쪽·2만7,900원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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