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를 수렁에서 건져낼 가장 바람직한 방법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

정준희 2026. 2. 2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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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범 사장의 ‘용퇴’만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현재의 KBS를 그나마 수렁에서 건져낼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는 말을 건네는 것조차 솔직히 계면쩍다.
2024년 11월18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박장범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후보자가 답변을 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박장범이라는 인물이 있다. 현직 한국방송공사, 즉 KBS의 사장이다. 1994년 KBS 기자로 입사해 30년 만인 2024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장으로 취임했다. 박장범의 최근 이력은 확실히 남다르다. 그가 KBS 기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뉴스 9〉의 앵커가 된 건 2023년 11월13일이다. 전임 김의철 사장이 임기 도중 해임된 후, 박민 전 사장이 취임한 날이다. 바로 그날 박장범 앵커는 〈뉴스 9〉를 시작하며 그간의 ‘불공정’ 보도를 반성하는 4분짜리 리포트를 냈다.

박장범 앵커가 널리 알려진 건 ‘조그마한 파우치’ 때문이었다. 2024년 2월 용산 대통령실에서 단독으로 이뤄진 윤석열과의 신년 특별대담이었다. 박장범은 2024년 11월18일 열린 사장 후보자 국회 청문회에서 이 대담을 적극 해명했다. 자신이 실제로 말했던 건 ‘조그마한 파우치’가 아니라 ‘조그마한 가방’이라는 항변이었다. “파우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스몰 백, 작은 가방이라고 풀이한다”라며, 공영방송에서 사용하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로서 “파우치라고 한 다음에 (그) 영어를 풀어서 ‘조그마한 가방’이라고 했다”라는 것이다.

그가 사장 자리에 공식 취임하기 직전인 2024년 12월3일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2월10일, 박장범은 당시 아직까지는 대통령이던 윤석열의 임명장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윤석열은 2025년 4월4일 파면됐고, 그 뒤로 이재명 정부가 들어섰다. KBS 이사회의 해임 의결이 없으면 대통령이 KBS 사장을 해임할 수 없다. 박장범은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지켜주기 위해 고안된 제도 덕분에 1년 넘게 사장으로 버티고 있다.

1월22일 그를 사장으로 만들어준 KBS 이사회의 현 구성이 위법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윤석열 정부 당시 이진숙의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가 2인 체제로 여권 추천 이사 7인을 의결하여 이를 대통령이 재가했는데, 그 자체가 원인 무효라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2월3일 항소 포기를 선택했다. 요컨대 박장범을 사장으로 만들어준 2024년 7월 KBS 이사회의 임명 제청 결정 역시 무효화되는 셈이다. 그 이후의 길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이사회 위법’ 판결 이후, 최선의 시나리오는

먼저 대통령이 법원 결정에 따라 박장범의 사장 임명을 직권취소하는 것이다. 이 경우 효력은 즉시 나타나지만 법적 다툼의 여지가 남는다. 다음으로 위법하게 임명된 7인 이사의 자리에 그전 이사들이 일단 복귀한 다음, 이들이 다수결로 사장 임명 취소 혹은 해임 결정을 내리고 이를 대통령이 재가하는 것이다. 이 경우 법적 다툼의 여지가 줄어들기는 하나 시간이 좀 더 걸리고 개정 방송법 취지상 신임 사장 선임까지는 그 이사회가 할 수 없을 테다. 마지막으로,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방미통위)가 최대 7인 최소 4인의 위원 체제를 완성한 후, 개정 방송법에 따라 새로운 KBS 이사 15인을 선임한 다음, 이들에 의한 박장범 사장 해임 의결-대통령 재가-신임 사장 선임으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절차적으로는 가장 바람직한 형태이나, 시간이 무척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으며 구체적인 전망을 하기 매우 어렵다.

2024년 2월4일 박장범 KBS 앵커(왼쪽)가 윤석열과 대담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여권 추천 방미통위 상임위원에 대한 국회 승인 절차도 난항이고, 야권 추천 상임위원은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윤석열 정부 시기 방통위 문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4인 체제가 반드시 필요할뿐더러, 되도록 7인 체제를 완성하여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가려는 게 이재명 정부의 취지인 듯하니 신속성을 기대하기란 여의치 않다. 게다가 개정 방송법에 따라 15인으로 늘어난 KBS 이사진은 국회 추천 6인, 시청자위원회 추천 2인, 임직원 추천 3인, 연관 학회 추천 2인, 변호사 단체 추천 2인으로 구성된다. 국민의힘이 자신의 추천 몫을 행사하지 않고 버티면 방미통위든 KBS 이사회든 완성이 한참 늦어질 게 뻔하다. 또 개정 방송법은 사장 선임에 재적 이사 5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요하는 특별다수제를 채택하고 있다. KBS의 시청자위원회는 현 사장인 박장범이 구성했고, 임직원 추천 역시 박장범 체제의 영향하에서 이뤄지게 된다. 말 그대로 거의 모든 면에서 오리무중이다.

박장범 사장의 운명은 정해진 셈이다. 그의 입장에서 가장 안 좋고 KBS 전체 입장에서는 그나마 나은 시나리오는 대통령이 일단 해임 처분을 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새로운 사장을 최대한 빨리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 길을 가더라도 KBS가 제 길을 찾기란 여전히 난망하지만 말이다. 그의 입장에서 가장 좋고 KBS 전체 입장에서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모든 절차적 요건을 거쳐 현 사장 해임 및 신임 사장 선임에 이르는 길이다.

여러모로 가장 바람직한 길은 박장범 사장이 용퇴하는 것이다. 어차피 취임 이후 1년 이상 박장범이 KBS 사장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한 게 없다. 게다가 박장범 사장의 다리에는 ‘내란 연루’라는 심각한 의혹이 묵중한 납덩이처럼 달려버렸다. 사장 ‘내정자’에 불과했던 박장범이 2024년 12월3일 계엄 선포의 밤에 당시 최재혁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그 직후 KBS 최재현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었으며, 최 보도국장은 퇴근 후 다시 회사로 돌아와 뉴스 부조정실에서 특보 전환을 준비했다는 게 현재까지 밝혀진 내용이다. 방송법 위반은 물론 형법상 내란 동조 내지 방조 혐의가 이로부터 발생한다.

1월26일 이호찬 언론노조 위원장(가운데)이 ‘KBS 사장 12·3 내란 방송개입 의혹 관련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사IN 박미소

박장범 사장은 최재혁 비서관으로부터 계엄 선포에 관해 아무것도 들은 바 없으며 아무런 지시를 내린 바도 없다고 해명한다. 지난해 이미 제기된 이 의혹에 대해 박장범 사장은 ‘근거 없다’고 국회에서 말한 바 있다. 당시 노종면 의원이 “내부 인사가 비상계엄에 대한 사전 협의나 공모, 인지를 하고 있었다는 의혹에 대해 회사 차원의 진상조사를 했나”라고 묻자, 박 사장은 “근거 없는 의혹 제기라고 판단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이번에 드러난 내용에 따르면 그 내부 인사에는 자신까지 포함될 수 있음에도 근거가 없기에 진상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답을 했던 셈이다. 진상조사를 할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라 진상조사를 하면 안 되었던 것이라고 보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이다. 심지어 박장범 사장 본인이 그 진상을 그 누구보다도 명확히 알고 있고, 그렇기에 국회 위증에 가까운 답을 하면서까지 끝끝내 덮어보려 애쓰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박장범은 용퇴할 용기가 있을까

따라서 박장범 사장에게 자신의 ‘용퇴’만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면서 현재 KBS를 그나마 수렁에서 건져낼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는 말을 건네는 것조차 솔직히 계면쩍다. 용퇴의 전제는 용기이고, 그 용기는 최소한의 품격과 윤리적 태도에서 나오는 것일 테니 말이다. 혹여 그런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KBS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은 수렁 바깥을 다시 꿈꾸며 무언가를 도모하기조차 여의치 않을 공산이 크다. 가장 중요하게는, 이제는 공영방송이 비판의 대상을 넘어 무관심의 대상으로까지 하락해온 이 비극적인 추세를 반전시킬 의지와 묘안이 적어도 KBS 내부에 움틀 만하거나 어떻게든 보존되어 있는지 역시 잘 모르겠다. 그토록 끔찍했던 윤석열 치하에서부터 내란 이후 1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KBS는 솔직히 무기력의 극치였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부단히 싸운 사람들이 있고, 공영방송의 가치와 효용을 지키기 위해 애써온 이들도 있으며, 부역을 거부함으로써 변방으로 밀려난 구성원들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KBS가 ‘복원’할 무언가가 있거나, ‘혁신’을 통해 가치를 새로 세울 지향점이 존재한다는 느낌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게 그저 윤석열과 박민과 박장범의 탓이기만 할까?

정준희 (미디어인문학교 해시칼리지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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