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 12조원' 英크라켄의 비결…전기국가 승부처는 '데이터'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인공지능(AI)이 전력 다소비의 주범을 넘어, 복잡한 전력 계통을 실시간으로 제어해 국가 에너지 경쟁력을 결정짓는 '두뇌'로 진화하고 있다. 과거 전력 산업의 승부처가 대규모 발전소와 송전망이라는 하드웨어 증설에 있었다면, 각 단계별 데이터를 통합해 전력 시스템을 최적화하는 운영체제(OS)와 알고리즘이라는 소프트웨어 개발이 중요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21일 전력 업계에 따르면 영국의 유틸리티 기업 옥토퍼스 에너지는 설립 10년만인 지난해 영국 전력 소매시장 점유율 25% 가까이를 차지하며 브리티시가스 등 전통 기업들을 제쳤다. 2017년 세운 자회사 ‘크라켄’이 개발한 AI 기반 유틸리티 운영체제(OS) 플랫폼이 핵심 동력이었다.
크라켄은 발전량 예측, 도매시장 거래, 요금 설계 및 정산, 고객관리까지 통합한 유틸리티 OS 플랫폼을 개발했다. 기술력만의 승리가 아니다. 유럽은 발전·계통·도매시장 데이터를 관련 규제에 따라 의무적으로 공개하고, 전력 소매시장을 경쟁 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토대가 AI 기반 유틸리티 플랫폼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열어준 셈이다.
반면 한국은 크라켄과 같은 기업이 성장하기에 제도적 기반이 부족하다. 한국전력과 전력거래소, 6개 발전 공기업, 민간 발전사들이 전력망 관련 데이터를 각각 보유한 채 실시간 운영·설비 정보는 거의 공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규섭 서울대 교수는 “연구·개발 목적의 정제된 데이터 공유 체계를 마련하지 못하면 글로벌 전력망 AI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고 말했다.
○경쟁사까지 쓰는 英AI플랫폼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4년 에너지 전환의 두 축으로 ‘인공지능(AI)을 위한 에너지’와 ‘에너지를 위한 AI’를 제시했다. AI가 전기를 많이 쓰는 산업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오히려 복잡해진 전력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핵심 기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IEA는 지난해 특별보고서에서 “기존 전력망에 AI 최적화 기술을 적용하면, 별도의 송전망 증설 없이도 재생에너지 수용 능력을 최대 40%까지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력망이 포화 상태에 가까운 한국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지는 대목이다. 핵심은 데이터다. AI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발전부터 송·배전, 최종 소비 단계에서 생성되는 방대한 데이터를 한데 모아 학습해야 한다는 점에서다.

데이터 통합의 중요성은 발전 비중이 재생에너지로 바뀔수록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대형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가 한 방향으로 흘렀다. 하지만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가 늘어나면 전기는 지역 곳곳에서 생산되고 동시에 소비된다. 전력 흐름이 복잡해질수록 AI의 실시간 학습을 위한 데이터 통합이 필수 요소로 떠오른다. 김영오 서울대 공과대학장은 “전력계통에 접목될 디지털 기술은 이제 에너지믹스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핵심 축”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환경 변화에 가장 먼저 대응한 곳은 재생에너지 보급이 빠르게 진행된 유럽이다. 유럽은 2013년 유럽송전망운영자협회(ENTSO-E) 투명성 체계를 통해 발전·계통·도매시장 데이터를 의무 공개한 데 이어, 2022년 에너지 시스템 디지털화 액션플랜을 통해 AI 기반 전력망 최적화 전략을 본격화했다. 여기에다 전력 소매시장도 경쟁 체제로 운영한 덕분에 크라켄 같은 기업들이 급성장한 것이다.
크라켄은 AI를 활용해 전력 소매사업의 운영 전반을 아우르는 통합 플랫폼을 만들었다. 모회사 옥토퍼스뿐 아니라 프랑스 EDF에너지, 독일 이온넥스트(EON Next), 일본 도쿄가스 등 세계 각지의 전력 소매사업자들이 크라켄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다. 크라켄은 현재 기업가치 86억5000만달러(약 12조원)대로 평가받으며 기업공개(IPO)를 준비 중이다.
한국은 해외와 전력망이 연결되지 않은 ‘계통섬’ 구조다. 전력 수급 불균형을 외부와 조정할 수 없는 만큼 내부 효율을 높이는 기술의 중요성은 더 크다.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은 국내에 AI 전력망을 도입하면 전력 시스템 총비용을 약 5% 절감하고, 별도의 전력망 증설 없이도 태양광 2.4 기가와트(GW)를 추가 수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데이터 공유해서 AI학습시켜야
기술력은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정밀 예측하는 60헤르츠, 인코어드 같은 기업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실시간 데이터 접근이 제한돼 역량을 충분히 펼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데이터가 없어서가 아니다. 기관별로 흩어져서 공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종규 60헤르츠 대표는 “에너지 공급과 수요 예측 관련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면 국내에서 크라켄 같은 서비스 기업은 성장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은 이미 ‘전력 데이터 강국’이나 다름없다. 한국전력의 송·변전 관제 시스템(SCADA)은 발전소와 변전소, 송전선로의 상태를 약 2초마다 자동으로 기록한다. 이렇게 1년 동안 쌓이는 데이터는 최대 1조5800억 개로 집계된다.
전국의 전기 수요와 발전량을 계산해 발전기 가동을 지시하는 전력거래소의 에너지관리시스템(EMS)에도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쌓인다. 한전의 배전망 운영 시스템(ADMS)도 지역별 전력 흐름과 재생에너지 등 분산형 전원을 관리하며 데이터를 수집한다. 가정과 기업에 설치된 지능형 전력계량기(AMI)에서는 전기 사용량이 자동 수집되는데, 이 소비 데이터는 연간 10조 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처럼 송전, 발전, 배전, 소비 단계에서 만들어지는 데이터가 AI가 학습할 수 있는 구조로 통합 관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관마다 시스템이 분리돼 있고, 보안과 영업기밀 문제로 데이터 공유도 제한적이다. 이상학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소장은 “한전이 데이터 개방센터(안심구역)를 통해 일부 자료를 공유하고 있지만, 대부분 기관은 법정 통계자료 외 운영 데이터 공개에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각각의 데이터를 비식별화하고 표준화해 통합 관리하는 ‘에너지 전용 데이터 스페이스’ 구축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이효섭 인코어드 소장은 “한데 모아진 데이터를 공유받을 자격과 범위를 명확히 정하고, 이를 관리할 전담 기관 체계를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데이터 공유 체계가 구축되면 효과는 전력망 지능화에 그치지 않는다. 재생에너지 발전량 예측을 넘어, 여러 소규모 발전원을 하나로 묶어 대형 발전소처럼 실시간 관제하는 가상발전소(VPP) 운영과 전력 수요 급등락에 맞춰 사용량을 조정하면 보상을 받는 수요반응(DR) 자동화까지 가능해진다. 차세대 전력 서비스 전반이 데이터와 AI를 기반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데이터 통합 이후에는 이를 안전하게 저장·학습할 국가 차원의 에너지 전용 컴퓨팅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력망은 안보와 직결된 분야인 만큼, 기밀을 보호하면서도 AI 학습에 활용할 수 있는 공공 주도의 인프라 설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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