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사 비평 대신 ‘뾰족한 서평’… 책과 사람 잇는 공론장 한발 더 [.txt]

“한국에도 서평 전문지가 필요하다.”
2000년대 들어 한국에도 ‘뉴욕 리뷰 오브 북스’처럼 본격적인 종합 서평 전문지가 나올 때가 됐다는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때론 서평지 창간 직전까지 갔다가 엎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러던 2020년 11월18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서평 전문지 ‘서울 리뷰 오브 북스’(서리북) 창간준비호 제작 프로젝트가 제안된 것이다. ‘서리북’의 탄생은 그 자체로 뉴스거리였다. 20시간 만에 1천만원이 모였고, 2주 만에 868명이 2914만2천원을 후원했다. ‘0호’는 초판이 매진돼 재쇄를 찍었다.
‘서리북’은 올 3월로 창간 5돌을 맞는다. ‘도파민 축제’를 벌이는 고자극 시대, 진지한 서평지의 5년 생존은 탄생보다 더한 뉴스거리가 됐다. 2021년부터 1년에 4권씩 펴낸 잡지는 2025년 겨울까지 창간준비호를 포함해 총 21권. 218명의 필자가 308권의 책에 대한 서평을 썼다. 프로젝트 제안자이자 초대 편집장인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는 감개무량해했다. “10년은 가자고 했는데 절반은 왔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 재직할 때부터 ‘뉴욕 리뷰 오브 북스’를 읽으며 한국에서 발간되는 수준 높은 서평지를 꿈꿨다. 서울대로 옮긴 뒤 출판인들을 만날 때마다 의사를 타진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그러다가 같은 학교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를 만나 의기투합했고, 서울대 내부 연구과제 형식으로 자금을 지원받았다. ‘든든한 물주’는 없었지만 포부는 컸다. 홍 교수는 “더 나은 지식 공론장을 만들기 위한 서평 전문지, ‘주례사 비평’ 없는 ‘뾰족한 서평’을 표방했는데 난관이 있었다”고 했다.
“외국도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한국은 아직까지 책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를 하면 ‘인신공격’이라 생각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뾰족한 서평은 저자에 대한 공격이 아닌데 말이죠. 서평을 쓰는 평자들도 해당 책을 비판할 여지가 있음에도 자제하는 분위기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서리북’이 할 얘기를 해왔다는 자부심은 있습니다.”(홍성욱)
끼리끼리 상찬해 주는 ‘인용 공동체’는 지적 카르텔을 만들며 더 나은 지식 생산을 방해하고, 좋은 책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서리북의 원칙은 간단했다. 중요한 책은 중요성을 제대로 짚어주고, 내용이 부실한 책은 성역 없이 비판하며, 주목받지 못한 책은 발굴해 소개하자는 것이었다. 편집위원들은 워크숍을 하면서 서평이란 무엇인지 토론했다. “서평도 하나의 장르이며, 책이 가진 잠재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글이라는 점에 공감했다”고 강예린 서리북 편집위원(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은 말했다. 편집위원들은 구글 독스에 글을 올려서 서로 논평과 댓글을 남겨 상호 비평하고 공부하는 기회로 삼았다. 타인의 글에도, 자신의 글에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신선한 시도가 이어졌다. 0호에서 이석재 교수(서울대 철학과)는 국내 미출간작인 ‘탈바꿈의 경험’(Transformative Experience, L.A. 폴 지음)에 대해 썼다. ‘나’를 완전히 탈바꿈하는 ‘인생 결정’의 경험과 곤경을 철학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디자인 저술가이자 사진책출판사 사월의눈 전가경 대표는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책의 해체’(2025 여름, 18호)라는 글을 통해 백인 남성 사진가들의 사진책 150여권을 찢어발겨 해체하는 도발을 감행한, 사진가 저스틴 컬랜드의 책(‘SCUMB Manifesto’)을 소개했다. 책이라는 사각 프레임이 가진 지배적 물성에 도전하는 책을 다뤄 ‘서평’의 영역을 확장한 도전이었다. 강 편집위원은 “책도 하나의 공간 같다. 책이 가진 가능성을 다른 방법으로 보는 책, 기존의 출판이 아닌, 군산북페어처럼 주류 출판시장이 아닌 곳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편집의 책을 풍부하게 다뤄왔다는 점이 서리북의 성과라고 꼽을 수 있겠다”라고 말했다.
캐나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이론이나 돈과 인생에 대한 충고를 담은 ‘세이노의 가르침’ 유행을 비판한 것은 ‘서리북’에서만 볼 수 있는 ‘뾰족한 서평’이었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서평 중 하나가 바로 2021년 창간호에 실린 김두얼 당시 편집위원(명지대 경상·통계학부 경제학전공 교수)의 ‘매끈한 서술과 설익은 통찰’이다. 사회학자 송호근 한림대 도헌학술원장 겸 석좌교수의 ‘인민의 탄생’(2011), ‘시민의 탄생’(2013), ‘국민의 탄생’(2020) 3부작을 비판한 글로, 거대한 기획과 방대한 분량에 견줘 책의 얼개가 헐렁하고 정교한 학술서로 보기엔 한계가 있다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이에 격분한 송 교수는 직접 항의하는 메일을 서평자에게 보내왔고, 자신이 재직하던 포항공과대학교 융합문명연구원이 펴낸 반년간지 ‘문명과 경계’에 글을 써서 간접적으로 응수했다. 서리북의 서평을 두고 “학문적 겸양 결핍”과 “경솔한 독서” 탓에 나온 “죽임의 비평”이라고 강한 불쾌함을 드러낸 것이다.
서리북의 2대 편집장을 맡고 있는 김두얼 교수는 “당시 송 교수의 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수십년 동안 학계에서 내공을 인정받은 학자라면, 다소 근거가 빈약해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벙벙한’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다’고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생산적인 토론으로 이어지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그에게 좋은 서평의 기준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선문답 같은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책을 넘어서서도 안 되고, 안 넘어서서도 안 되는 그 어딘가 서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평을 읽고 나면 책 한권을 읽은 듯한데, 단순히 요약한 글이 아니라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경계를 생각하게 하는 서평이 좋은 서평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최근호인 20호 서리북의 특집은 ‘누가 여성을 두려워하랴’다. 2022년부터 ‘서리북’과 인연을 맺은 현시원 편집위원(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이 책임 편집을 맡아 ‘페미니즘 대중화’ 10년을 기념했다. 잊힌 여성들을 다룬 이 책에서 현 위원은 2025년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 전시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에 대해 썼다. 조지 오웰의 배우자 아일린 오쇼네시의 생애를 기록한 ‘조지 오웰 뒤에서’(서평자 한승혜), 주디스 버틀러의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김은주), 수컷 중심의 진화생물학을 뒤집어엎은 루시 쿡의 ‘암컷들’(임소연), 2023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클로디아 골딘의 대표작 ‘커리어 그리고 가정’(전은지)에 대한 서평도 실었다. 현 위원은 ‘좋은 서평’의 핵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요약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된 요약은 정말 지적인 힘을 가지죠. 인공지능(AI)이 요약을 대신 해주는 시대에 역설적인 것 같지만, 스스로 요약하는 힘을 기르는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어요.”

독자와 접점을 찾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서리북은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아모레퍼시픽재단과 알라딘의 후원으로 총 1천만원(최우수작 1편 300만원, 우수작 7편 각 100만원) 상금의 ‘우주리뷰상’을 공모했다. 2024년 첫 공모에는 총 478편의 서평이 쏟아져 들어왔고, 2025년 우주리뷰상에도 총 500여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시적이면서도 예술적인 문장이거나, 그림책을 감동적으로 표현하면서 서평의 형식을 뒤흔드는 신선한 글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서평 심사나 글에 대한 감식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역시나 에이아이 기술 때문이다. 2회 리뷰상 공모 심사위원회는 수상 후보작들에 대해 생성형 인공지능 활용 여부를 탐지하는 솔루션을 적용했다. 당시 심사에 참여한 전은지 편집위원(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교수)은 “에이아이 기술의 사용은 우리 모두의 숙제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서평은 더더욱 책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고 말했다.
“서평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저도 책을 샀는데, 이게 서평의 중요한 역할인 것 같습니다. 책이 재미있다는 걸 안다면 누구나 읽게 됩니다. 단지 몰입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에요. 책이 재미있다는 사실을 공유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서평입니다.”

이 품격 있는 잡지의 생존은 결국 발행 부수 같은 경제적 문제와 직결된다. 현재 서리북은 계간지 주기로 각각 2천부씩 발간하고 있다. “영어권 최고의 문학·지성지”로 일컬어져온 격주간지 ‘뉴욕 리뷰 오브 북스’는 1963년 창간되어 2020년 기준 발행 부수 13만부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잡지도 최근엔 독자들의 고령화에 직면해 새로운 독자층 발굴이라는 과제를 안게 됐다. 1979년 창간한 ‘런던 리뷰 오브 북스’ 역시 격주간지로, 2022년 기준 발행 부수가 9만1859부였다. 잡지 판매는 여전히 증가 추세이며, 정기 기고자도 부커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소설가 힐러리 맨텔, 시인 겸 소설가 퍼트리샤 록우드 등을 비롯해 영어권 잡지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처음 서울 주요 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편집위원회가 꾸려진 ‘서리북’은 애초 서울대 내부의 연구 프로젝트로 출발해 인문사회벤처를 지향했다. 이후 ‘사단법인 서울서평포럼’으로 발행 주체를 변경해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서평 중심의 온라인 공론장을 만들어보자던 계획도 수정되어 지금처럼 종이책 서평지로 굳어졌다. 2024년엔 출판사 알렙이 잡지를 인수했고 전문 편집자들이 힘을 보태면서 좀 더 잡지다운 구색을 갖췄다.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 창작 주체(매체발간) 지원사업으로 원고료 일부를 충당한다. 김 편집장은 “한호한호 생존이 목표”라고 했고, 알렙 조영남 대표는 “매출은 큰 적자가 나지 않는 수준”이라고 했다. 조 대표는 “결국 잡지라는 것은 사람 사이의 연결이고, 앞으로 전국의 독립서점 등과 더 긴밀히 협력하며 책과 독자의 고리를 강화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오는 22일 ‘서리북’은 서울 마포구 책방무사에서 잡지와 그간 다룬 책들을 진열, 판매하는 일일책방을 연다. 이날 같은 곳에서 뮤지션 겸 작가 요조, 김두얼 편집장, 김겨울 작가 겸 북튜버가 함께하는 좌담회도 계획하고 있다. 2015년 책방무사를 연 서점인이자 책방지기로도 이름 높은 요조 작가는 “서리북이 나오고 처음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서평은 해당 도서를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큐레이터의 역할을, 해당 도서를 읽은 독자들에게는 더 넓고 깊은 독서의 쾌감을 맛볼 수 있게 해주고 저자에게는 무엇보다 귀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중 가장 행복한 사람은 서평을 쓰는 그 자신이 아닐까요. 얕고 빠르게 경험하며 사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진 지금, 저는 무언가와든 ‘깊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이 시대에서 누릴 수 있는 아주 큰 행운이라고 봅니다. ‘서리북’ 같은 서평지를 포함해 이 세상의 모든 서평 공간은 어렵고 귀한 행운이 가능할 수 있게 해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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