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버지의 거제수용소 '탈출' 주장… 터무니없는 상상이었다


두 대통령을 배출한 섬, 거제도
국가인권위원장으로 일하던 시절의 일이다. 동료 위원이 텔레비전 주말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를 즐긴다고 했다. 신세대 언어와 감각을 익히는 데 매우 유익한 프로그램이라며 추천했다. 그의 추천을 받아 나도 몇 차례 보다가 재미가 붙어 몇 년 동안 시청했다. 내가 즐긴 프로 중에 〈거제도〉라는 소극(笑劇)이 있었다. 주역 개그우먼 신보라의 출신지를 따서 작명했다고 한다. 신보라는 노래도 춤도 연기도 재능이 펄펄 넘쳤다. 그의 발랄한 연기를 활짝 웃고 즐기면서도 내 마음 깊숙이 깔려있는 음울한 거제도를 떠올렸다. 내게 거제도는 개그로 웃어넘길 수 있는 유쾌한 지명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거제도 트라우마를 앓으며 자란 셈이다. 네 살 어린 나이에 할머니 손을 잡고 포로수용소에 갇힌 아버지를 만나러 여러 차례 거제도 나들이를 했다. 어슴푸레한 장면이 스틸 사진처럼 흐릿한 내 의식 뒤편에 잔영이 남아 있다. 뱃전에 오르다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져 죽은 어린아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한탄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 어린 나이에 나는 바다는 무섭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그날 이후로 내 의식 한가운데 뿌리내린 무서운 바다 한가운데에 거제도가 자리하고 있다.
남해의 큰 섬 거제도는 두 대통령을 배출한 사실만으로도 한국 현대사에서 상징과 비중이 무겁다. 김영삼 대통령은 평생 정치인의 길을 걸어 정상에 오른 사람이다. 대학에 들기도 전에 이미 장래의 꿈을 대통령으로 설정하고 일로매진했다고 전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쩌다' 그 자리에까지 떠밀려 올라간 사람이다. 그는 당초 정치지망생이 아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부산 문 변호사'의 평판을 듣고 있었다. 출신 지역이나 대학이 나와 겹치는 이른바 '주류' 법률가들 사이에서도 '마이너 리거' 문 변호사의 평판은 높았다. 제 잘난 맛에 취해 남을 인정하는데 극히 인색한 그들도 문 변호사의 실력과 인품을 높게 알아주었다. 운명은 순응하는 사람은 손잡고 가고, 저항하는 사람을 끌고 간다고 한다. 운명에 떠밀리다시피 정치에 나선 그를 지지하기 위해 나는 두 차례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를 알아가면서 존중하다 못해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포로수용소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傷兵捕虜) 동지들에게〉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다.
(중략)
그것은 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지요.
누가 거제도 제61포로수용소에서 단기 4284년 3월 16일 오전 5시에 바로 철망 하나 둘 셋 네 겹을 격(隔)하고 불 일어나듯이 솟아나는 제62적색수용소로 돌을 던지고 돌을 받으며 뛰어 들어 갔는가.
(하략) (1953. 5.13)
김수영(1921-1968)이 생전에 공식적으로 세상에 내놓지 않은 자전적 시다. '절대 자유의 시인'으로 널리 추앙받는 김수영은 평생 수용소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것이다. 시로 부족하여 소설도 시도했다. 수용소에서 나온 직후에 쓴 미완성 소설 〈의용군〉은 초고 상태로 남아 있다가 사후에야 공개되었다. 그의 절대 자유 철학의 원천은 타고난 시인 기질 못지않게 포로로 감금되었던 경험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10여 년 전 동생과 함께 몇 차례 자동차로 거제섬을 일주했다. 동생은 1960년대 후반에 아버지와 함께 여러 날 거제에 머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자신이 감금되어 있던 포로수용소의 흔적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2010년 여름에야 비로소 현장을 방문했다. '역사공원'으로 조성된 후의 일이다. 필시 60년 전 할머니 손에 이끌려 몇 차례 들렸을 터이다. 어머니도 모두 열네 차례 뱃길을 넘나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관련된 많은 자료를 읽었다. 단편적인 회고담도 많이 접했고 소설도 여러 권 읽었다. 하진(Ha Jin(哈金))의 소설, 《전쟁 쓰레기 War Trash》(2003)를 포함하여 중공군 포로에 관한 스토리도 챙겨 읽었다. 그러나 내 아버지에 관련된 공적 기록은 애써 탐문하지 않았다. 파고들수록 실체가 허망할 것이라는 예감이기도 했다. 아버지 스스로 창조하기도 했고 확대하기도 했던 신화와 전설은 고스란히 남겨두고 싶은 숨은 욕망이기도 했다.
조기 석방? 탈출?
언젠가 술에 취한 아버지는 파란으로 점철된 일생을 통해 자신이 성취한 가장 큰 위업이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일이라고 했다. 사람이 아무리 절박한 상황에 내몰려도 포기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면 반드시 수가 있는 법이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초등학교 시절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되풀이해서 들은 이야기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데 어느 날 정문으로 미군 지프가 쏜살같이 질주하는 모습을 보고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듯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안전하게 바깥으로 나갈 방법은 정문을 통과하는 수밖에 없다. 철조망은 죽음의 전선일 뿐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깨치는 데 왜 그렇게나 복잡한 번민의 과정이 따랐을까, 인간의 직관은 이성적 논리에 선행하는 것인가보다.
일단 결론이 났으니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어떻게 정문을 통과할 것인가? 답은 출입증을 위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당하게 정문을 걸어 나갈 것이다. "동무, 선(線)이 내려왔소!" 아직도 바깥과의 은밀한 소통이 이루어지던 때다. 포로를 지휘하기 위해 위장입소한 인민군 총좌 박상현 스토리는 세계 포로수용소 역사의 상식을 뒤엎은 사례였다. 만약 아버지가 박상현 비슷한 공산당 간부였고, 공작 차원에서 아버지를 탈출시킬 당의 결정이 내려졌다면 가능한 일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다. 이렇듯 황당무계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신비롭게 들리기에는 나는 너무나 자랐고, 취중이지만 반복되는 기억의 윤색 탓에 확정되어 가던 아버지의 과장이 안쓰럽기도 했다. 내가 성의 있는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아버지의 '엑소더스' 세부 플롯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아버지의 '탈출' 스토리는 소설적 상상에 불과했다고 믿는다. 현재 가진 것이라곤 전혀 없는 중년 사내가 시리고 시린 나신을 덮기 위해 환각으로 짜깁기한 홑이불 자락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시나마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던 사실은 평생토록 아버지의 일상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되었다. 아버지가 인민군 소좌 출신이니 하는 류의 음해가 무성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 아버지가 정치적 야심을 품자 온갖 루머가 증폭된 것이다. 후일 '탈출 스토리'를 각색한 아버지 스스로의 책임도 가볍지 않을 것이다.
1967년 여름의 일로 기억한다. 방학이 되어 고향에 갔더니 부산 문화방송 전속작가로 근무하던, 아버지 연배의 강하영이라는 분이 한 달 가까이 우리 집에 머물면서 아버지의 스토리를 멜로 드라마 극본으로 쓰고 있었다.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는 과정에 간호원과의 사랑을 허구로 삽입했다. 강 선생이 초를 잡은 원고를 읽어주면 아버지가 연신 "멋있다!"며 맞장구를 치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나 강 선생이 공들여 쓴 극본은 방송을 타지 못했다. 방송국의 자체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아직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야기는 공개적으로 다루기에 너무나 민감한 주제였다. 더구나 비록 허구로나마 탈출을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