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얼굴에 침뱉은 딸… 설명될 수 없는 상처, 트라우마에 대하여 [2026 베를린영화제]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6. 2. 21.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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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영화의 좌표를 가늠하는 2026년 베를린영화제 현지에서 ‘최고상’ 황금곰상을 놓고 겨루는 경쟁 부문(Competition) 소식을 전합니다. 22편의 후보작 가운데 현지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은 작품들만 엄선해 전합니다. 수상 결과는 22일 새벽(한국시간 기준) 발표됩니다.
영화 ‘조세핀’의 한 장면. 왼쪽부터 엄마 클레어, 딸 조세핀, 아빠 다미엔. 딸아이가 성폭행 현장을 목격한 뒤 깊은 트라우마로 문제적 행동을 일으키면서 부모인 클레어와 다미엔은 극한 갈등에 빠지고 맙니다. ‘설명되지 않는 악, 이해할 수 없는 악’을 이 영화는 질문합니다. 압도적인 연출력과 서사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베를린영화제 홈페이지]
극히 평범한 아침이었습니다. 아빠 다미엔은 사랑하는 8세 딸 조세핀과 함께 축구공을 들고 공원으로 향합니다. 장난을 치던 조세핀이 앞서 달려가고, 갈림길에서 다미엔이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그때, 길을 걷던 조세핀 눈앞에 여덟 살의 마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말로 도저히 옮겨적기조차 끔찍한 폭력의 현장을 조세핀이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두 눈으로 목격한 겁니다.

베스 데 아라우조 감독의 영화 ‘조세핀’의 줄거리입니다. 올해 제76회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공개된 영화로, 20일(현지시간) ‘조세핀’이 상영된 베를리날레 파라스트의 객석은 그야말로 ‘숨도 못 쉴’ 지경이었습니다. 차마 바라보기도 힘든 악을 8세 여자아이의 시선에서 그린 작품으로 역시 논쟁작입니다.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조세핀’을 현장에서 살펴봤습니다.

20일(현지시간) 베를린영화제 기자회견에 참석한 ‘조세핀’의 주역들. 왼쪽부터 감독 베스 드 아라우조, 조세핀 역의 배우 메이슨 리브스, 엄마 클레어 역의 젬마 찬, 아빠 다미엔 역의 채닝 테이텀. [EPA·연합뉴스]
갈림길에서 아빠와 헤어진 조세핀은 조깅 중이던 한 언니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나무 뒤에서 우연히 바라봅니다. 공원 화장실 건물 뒤편에 숨어 있던 한 남성이 뒤따라 들어가고, 화장실 내에서 여성의 비명이 들립니다. 젊은 여성은 화장실 밖으로 도망치려 하지만 범인에게 붙잡히고, 공원 화장실 앞에서 끔찍한 사건을 당합니다. 노상에서, 그것도 해가 비치는 나무 아래에서 말이지요. (영화는 이 장면을 조세핀의 시선에서만 처리하기에 현장과 카메라 간 거리가 멀어 성폭행 현장이 세밀하게 재현되진 않지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객석에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성 관련 장면은 오직 ‘아이’의 시선에서만 그려집니다.)

다미엔이 딸 조세핀을 부르며 다가오자, 범인이 도주합니다. 있어선 안 안되는 상황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다미엔이 조세핀에게 “아무데도 가지 말고 있으라”고 말한 뒤 범인을 뒤쫓고, 다미엔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과 다미엔이 함께 범인을 현장에서 즉시 검거합니다.

그러는 사이, 어린 조세핀은, 경찰차 뒷좌석에서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희생자 언니와 함께 앉게 됩니다. 아이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언니가 왜 우는 건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도무지 설명해줄 수 있는 어른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결코 유쾌한 사건이 아니란 걸 조세핀도 알고 있었고, 아이는 침묵 속에서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20일(현지시간) 베를린영화제 기자회견에 발언 중인 아빠 다미엔 역의 채닝 테이텀. 그는 딸의 질문을 받고 도저히 설명되지 못하는 악 앞에서 갈등합니다. [EPA·연합뉴스]
성폭행범을 잡은 다미엔은, 서둘러 딸아이가 이 상황을 잊을 수 있도록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공을 차러 갑니다. 방금 벌어졌던 일에 대해 딸에게 도무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도 충격을 받았지만 딸아이 앞에서 내색할 순 없었습니다. 악의 어두운 그림자가 딸과 자신의 삶에 드리워졌음을 다미엔은 직감합니다.

그때, 딸 조세핀이 아빠에게 묻습니다.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질문이었지요.

“Dad, what was the man doning?(아빠, 그 아저씨가 뭘 하고 있던 거야?)

이후 이어지는 이 영화의 서사는 정말이지 압도적입니다. 평범한 얼굴의 조세핀은 ‘RAPE’란 단어를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하고, 마트에선 인형 대신 자신을 보호해줄 총 장난감을 사려 합니다. 잠들기 전 문을 꽁꽁 잠그고, 거리에서 마주친 남자들을 모두 의심하며 바라보는 상황이 됩니다. 조세핀의 마음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방어기제로 가득합니다. 특히 떼를 쓰는 조세핀을 아빠 다미엔이 혼을 내려 하자, 조세핀이 아빠의 얼굴이 침을 뱉으며 저항하는 극한 갈등까지 발생합니다. 왜 하필 ‘침’을 뱉었는지는 영화에서 그려지는데, 이 장면에서 객석 곳곳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습니다.

지난 20일(현지시간) ‘조세핀’이 상영된 베를린영화제 주극장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의 1층 모습. 너무 서둘러 도착했던 탓인지 극장이 비었지만 영화가 시작되던 시점엔 전석이 매진됐습니다. [김유태 기자]
특히 영화 후반부엔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어린 조세핀을 법정에 세울 것인가’란 난제가 극을 지배합니다. 조세핀만이 성폭행 사건의 직접 목격자였으니까요. 이에 따른 아동 트라우마의 문제가 재판 과정에서 핵심으로 부상하는데, 아이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가란 질문까지 뒤따르면서 영화는 난수표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영화 ‘조세핀’은 성폭행 현장을 직접 목격한 여자아이를 통해 ‘설명될 수 없는 악’을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강간’이 뭔지, ‘성폭행’이 뭔지, 또 그 언니는 왜 울고 있던 건지를 설명할 수 있는 부모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이 세상은 선악이 공존하지만 선을 설명할 순 있어도 악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어린 딸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이다 보니, 다미엔의 상황에 처했다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나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습니다.

영화 ‘조세핀’에서 엄마 클레어 역을 맡은 젬마 찬. [EPA·연합뉴스]
다미엔 곁에서, 딸아이를 보호하려는 엄마 클레어가 자리합니다. 조세핀이 점차 극단적인 이상행동을 보이면서 엄마 클레어는 세상의 범죄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클레어는 보호본능으로 조세핀을 감쌉니다. ‘조세핀’은 이처럼 순수함을 파괴한 세상의 악과, 마음이 금이 간 어린이와 가족이 마주하는 아픔을 매우 섬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 ‘조세핀’은 연출력도 뛰어납니다. 아이 조세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상, 아이의 상상이 화면에 가득 차기도 합니다. 조세핀과 범인 그레그가 한 화면 안에 담기는 장면이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데, 그 순간 객석에선 큰 탄식이 이어졌습니다. 평범한 아이 방 안에 범인이 앉는 모습이 그려지는 순간, 그 장면은 극단의 공포로 관객의 살갗을 파고들었습니다.

영화 ‘조세핀’은 22일(한국시간) 열리는 베를린영화제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받을 수 있을까요.

영화 ‘조세핀’ 티켓.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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