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 도운 것 후회”… 필리핀 대통령·부통령 막장 싸움
대선 손잡고 권력 쥔 후 티격태격
두테르테 ICC 압송에 갈등 폭발

차기 대통령 선거까지 2년 3개월 남아 있는 필리핀에서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온 현직 부통령이 전격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국정 1·2인자 간 권력 투쟁이 불붙고 있다. 소수의 권력가 집안 출신들이 요직을 독점하며 쥐락펴락해온 필리핀 특유 정치 풍토 속에 ‘가문의 전쟁’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사라 두테르테(48) 필리핀 부통령은 지난 18일 “조국을 위해 내 삶과 미래를 걸겠다”며 2028년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러면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69) 대통령을 겨냥해 “그의 당선을 도운 것을 국민들께 깊이 사과드린다”고도 했다. 앞서 2022년 대선에서 마르코스 주니어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짝을 이뤄 출마한 것을 후회한다는 입장까지 내놓은 것이다. 이 출마 선언을 통해 2022년 대선에서 전례 없는 압승을 일궈낸 마르코스 집안과 두테르테 집안 간 연정이 완전한 파국을 맞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라의 아버지는 직전 대통령이었던 로드리고 두테르테(81)이고, 마르코스 주니어의 아버지는 20년 넘게 장기 집권하며 폭정을 일삼다 1986년 시민 봉기로 축출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다. 당시 배우자 이멜다의 호화로운 생활상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독재자의 귀환’이라는 비판 여론 불식에 부심하던 마르코스 집안과, 단임제에 따른 퇴임 이후에도 국정 영향력 유지를 꾀하던 두테르테 집안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둘의 연대가 성사됐다. 이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마르코스 주니어는 58%를 득표해 민주화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뒀다. 사라는 부통령 선거에서 62%의 득표율로 더 크게 이기며 차기 대선 주자로도 각인됐다.
새 정부는 사실상 두 가문의 연대로 인식됐고, 마르코스 주니어와 사라의 다수 친·인척이 정부·의회·지방 권력 요직을 꿰찼다. 그러나 국방장관으로 겸직시켜 달라는 사라의 요구를 마르코스 주니어가 거절하고 대신 교육장관직을 준 것을 시작으로 임기 내내 둘의 갈등이 곳곳에서 불거졌다.
2023년 12월 필리핀 감사원이 부통령실에서 1억2500만페소(약 31억원)의 괴자금을 발견했다고 밝히면서 사라는 부패 의혹에 휘말렸다. 사라는 “이 조사는 대통령의 사촌인 하원의장이 주도했고, 두테르테 가문에서 차기 대통령을 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반격했다. 사라는 2024년 11월 “내가 죽으면 마르코스 대통령 부부와, 하원의장을 죽여 달라고 청부업자를 만나 부탁했다”고 말해 필리핀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필리핀 대통령실은 대통령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경호를 강화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틀어졌다.
2025년에는 의회의 친(親)마르코스 의원들의 주도로 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 대법원이 절차적 미비를 문제 삼아 무효 판결을 내리면서 사라가 부통령직을 상실하지는 않았지만 정상적인 국정 운영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2025년 3월 두테르테가 필리핀 수도 마닐라 공항에서 체포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로 압송되면서 대통령·부통령의 갈등은 폭발 직전으로 치달았다.
앞서 두테르테는 대통령 재임 중 마약·범죄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공권력을 남용해 무차별 인명을 살상한 혐의로 ICC에서 체포영장이 청구된 상태였다. 그러나 두테르테 측은 가문의 집권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마르코스 가문이 깊숙이 관여했다고 보고 있다. 과거에도 필리핀 대선은 정파와 이념을 넘어 소수 권력가 집안의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조기에 갈등이 불거지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이 때문에 파국을 막기 위한 물밑 움직임이 진행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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