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정상화가 무대 꾸민 연극, 진해까지 순회공연
예술가와 친구들
![2014년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서 정상화. 그의 단색화는 물감을 채우고 깨는 무한 반복 수행이다. [사진 갤러리현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4/joongangsunday/20260224165241650ndhd.jpg)
해방 이후 서양화가 임호와 나중에 조각가로 유명해진 문신(1923~1995)이 마산중 미술 교사로 부임했다. 정상화는 문신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문신·임호 등 미술 교사들이 학교를 떠나자 미술에 소질이 있는 학생들끼리 모여서 그림을 그렸다. 구마산 추산동 언덕배기에는 문신의 집과 아틀리에가 있었다. 오늘날의 문신미술관이 들어선 그 자리다. 아틀리에 앞은 화원이었다. 어린 미술학도들이 문신의 아틀리에를 들락거리며 그림을 배웠다. 소년 정상화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서양화가 문신은 나무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 액자를 잘 만들었다. 자신의 그림은 자신이 직접 제작한 액자에 끼워 넣었다. 정상화도 문신을 따라 액자를 만들기도 했다. 문신은 파리로 가서 조각가로 전향했다. 정상화가 처음 파리에 정착했을 때 문신의 아르바이트를 잠시 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연속적이었다.
![정상화, 무제 74-6, 1974, 캔버스에 아크릴릭, 227x181㎝. [사진 갤러리현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4/joongangsunday/20260224165241929tpbf.jpg)
마의태자를 구마산의 시민극장에서 이틀, 신마산의 마산극장에서 하루 공연했다. 나중에 영화배우로 유명해진 1학년 이수련(1935~2007)이 백화공주 역을 맡았다. 3학년 정상화, 2학년 윤영배 등 미술부원들은 무대 미술을 담당했다. 나무를 잘라 무대 소품으로 칼·창 등 만든 후 그 위에 미디엄도 섞지 않은 싸구려 금분을 생으로 입혀 색을 내었다. 흰색 안료가 없어 약국에서 아연화(亞鉛華)로 불리던 분말을 사다가 개어 썼다. 미술부원들은 추위와 싸워가며 공연 중에 계속 소모되는 소품을 무대 뒤에서 그때그때 새로 만들었다. 공연에 대한 마산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진해까지 순회공연이 이어졌다.
정상화는 1953년 임시수도 부산에 있던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1955년, 이림(1917~1983)이 부임할 때까지 마산고에는 미술 교사가 있다가 없다가 했다. 방학이 되어 마산을 방문한 대학생 정상화는 미술 교사가 없는 마산고 미술부 재학생들을 이끌고 마산에서 창원 성주사까지 구보했다. 맨몸으로 뛰어도 힘든 40리 길(15.7㎞)이다. 도시락에 무거운 화구까지 메고 뛰었으니 더 힘들었다. 미술 교사를 대신하여 선배 정상화가 미술부를 빡세게 지도했다.
대학생 정상화는 마산의 기성 작가들과 함께 활동했다. 문총마산지대미술전(1953년 12월~1954년 1월, 등대·사랑다방)의 출품 작가는 김재규·김주석·문신·박용훈·박진근·박해강·박홍석·이림·이수홍·최영림·정상화다. 1955년 마산에는 흑마회 창립전이 남성동 마산저축은행(현 스탠다드차타드은행 마산지점)에서 열렸다. 안윤봉이 회장을 맡고 기성 작가인 이림·이수홍·임호·전혁림 등이 출품했는데 여기에 대학생인 정상화도 참여했다.
이 전시에 작가로 참여한 정영규는 마산에서 오광사라는 큰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마산합포구 오동동에 고려호텔을 설립했다. 정영규와 정상화는 형제지간으로 친했다. 자녀들을 모두 미술대학에 보낼 정도로 미술에 열성적이었던 재력가 정영규는 정상화의 청년 시절부터 그림을 사주는 등 지속해서 그의 화가 활동을 지원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정영규의 딸 옥선과 정상화의 딸 인선은 지금도 자매지간으로 친하다.
1957년, 정상화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인천사범학교로 부임한다. 서울대 미대 학장 장발의 추천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지프에 실려 인천으로 끌려가다시피 해서 갔다. 인천사범학교의 제자로 서양화가 최명영·이반, 조각가 김창희 등이 있었다. 학생들에게도 좀 빡센 데가 있었다. 마산상고를 졸업한 동향 출신의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2018)과 인천사범학교에 함께 근무했다. 물감을 쏟아부은 것 같은 정상화의 앵포르멜을 국문과 출신의 김윤식이 이해할 리 없었다. 위아래도 구별되지 않는 그림을 학교 창고에서 주워 와선 자신의 하숙방에 걸어 놓았는데, 나중에 이를 발견한 정상화가 그림이 거꾸로 걸렸다며 거칠게 항의했다. 한바탕 웃음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서울예고 교사를 하던 정상화는 일단 일본으로 간 다음 1년 반의 파리 생활을 거쳐 다시 1969년 가을에 일본 고베에 안착했다. 신카이치(新開地)의 후지타(藤田) 빌딩 6층, 자그마한 공간이 그의 거처가 되었다. 1972년 동경의 ‘국제판화비엔날레’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미술평론가 이일은 일부러 고베까지 갔다. 거기서 매우 활달한 모습으로 어느 가게의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정상화를 만났다. 정상화는 고베의 모토마치 화랑 소속으로 활동하며 일본 화단과도 관계가 깊었다. 프레스기도 없이 제작한 자그마한 단색 목판화는 동경 긴자의 류마니테 화랑으로 보내졌다. 매달 두세 점 정도의 판매에 따른 소액의 작품료가 들어왔다.
이 무렵 만난 교토의 재일교포 여성이 그의 새로운 동반자가 되었다. 교토 스미조메에 사는 재일교포 화가 곽덕준 부부는 주말이면 고베의 정상화를 찾아왔다. 시끌벅적한 한국인 공동체가 고베에서 이루어졌다. 1977년, 정상화는 다시 파리를 향한다. 이번에는 십수 년간 파리에 정착한다.
![1983년 정상화(왼쪽에서 세번째)가 현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이우환, 박서보, 윤형근(왼쪽부터)과 함께한 모습. [사진 갤러리현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4/joongangsunday/20260224165242203ertf.jpg)
흔히 정상화를 단색화 화가라고 한다. 단색화는 반복적인 수행의 작업으로 정의되어 가는 추세다. 그 정의가 틀림없다면 정상화야말로 최고의 진정성을 갖춘 단색화 화가가 아닐까 한다. 그의 작업은 사각형 그리드에 물감을 채우고 이를 다시 깨고 메우며, 틈 사이로 숨을 불어넣는 무한 반복의 수행이다. 낙엽을 쓸고 나면 또 낙엽이 쌓이는 절 마당의 빗자루질 같은 노동을 캔버스 위에 오직 자신의 몸 하나로 평생 펼쳤다.
2026년 1월 28일 새벽, 그는 평생의 빗질을 멈추었다. 후배 화가 이우환이 짧은 추도사를 남겼다. “정상화 선배 영전에 / 쌓았다 헐었다 어이없는 작업 / 숨 쉬는 흔적의 빛나는 회화 / 인생은 끝나도 예술은 영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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