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타버렸던 피겨 천재, 다시 불타오르다

김민기 기자 2026. 2. 21.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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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사 리우, ‘번아웃’ 딛고 女싱글 우승… 美 24년 만의 금메달
알리사 리우가 20일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 스케이팅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2022 베이징 대회 이후 ‘번아웃’ 증상으로 한동안 빙판을 떠났던 리우는 성적 부담을 내려놓고 돌아온 이번 올림픽에서 2관왕에 등극했다./게티이미지코리아

20일(한국 시각)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26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알리사 리우(21·미국)가 도나 서머의 노래 ‘맥아더 공원’에 맞춰 경쾌한 연기를 선보이자 관중들도 덩달아 들썩였다. 모든 점프를 안정적으로 소화한 리우는 연기를 마친 뒤 흡족한 표정으로 “이거야, 바로 이거!”라고 외치며 링크를 빠져나갔다. 150.20점으로 올 시즌 세계 최고점. 합계 226.79점을 기록한 그는 2002년 이후 24년 만에 여자 싱글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낸 미국 피겨 선수가 됐다. 앞서 9일 단체전에 이어 대회 2관왕에도 올랐다.

출중한 실력만큼 화제를 모은 건 독특한 헤어스타일이었다. 여자 피겨 선수들이 보통 흐트러지지 않는 정갈한 헤어스타일로 빙판 위에 서는 것과 달리 리우는 마치 너구리 꼬리처럼 검은색과 노란색이 번갈아 여러 층을 이룬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어 뒤로 늘어뜨렸다. 연기를 마친 뒤엔 활짝 웃으며 손으로 어깨 너머 자신의 머리를 툭 치는 익살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미국의 알리사 리우가 19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26 동계올림픽 여자 피겨 싱글 프리 프로그램에서 경기를 펼치고 있다./AP 연합뉴스

피겨 선수가 단정하지 못하다며 눈살을 찌푸린 시선도 있었지만, 리우에게 자유분방한 머리카락은 ‘또 한 번 성장했다’는 훈장과 같았다. 그는 “나무의 나이테에서 영감을 받은 헤어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한 해 동안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은 나무가 고리를 더하듯, 리우도 2023년부터 매년 머리에 줄을 더하고 있다. 단순한 스타일을 넘어 리우가 삶의 굴곡을 견디며 쌓아온 시간의 흔적인 것이다.

이처럼 남다른 개성의 이면에는 평범하지 않은 가족사가 자리한다. 중국 쓰촨성에서 태어난 아버지 아서 리우는 광저우 중산대 재학 시절인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군 진압에 맞서 학생 시위를 조직하다 공산당의 심문을 받았다. 투옥을 피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홍콩으로 탈출을 감행했고, 곧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에 정착해 변호사가 됐다.

중국의 한 자녀 정책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던 아서는 난자 기증과 대리모를 통해 다섯 자녀를 얻었다. 그는 큰딸 알리사가 중국계 미국 피겨 스타 미셸 콴처럼 되길 바랐다. 아버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속에 리우는 만 13세였던 2019년, 미국 역사상 최연소 피겨 챔피언에 올랐고, 미국 여자 선수 최초로 한 대회에서 트리플 악셀을 세 차례 성공하는 기록도 세웠다.

하지만 이른 성공은 ‘번아웃’으로 이어졌다. 코로나 여파로 링크장이 문을 닫자 리우는 마음 편하게 쉬면서 피겨가 없는 삶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코치를 갈아치우는 등 지나치게 결과에 집착하는 아버지와도 거리를 두고 싶었다. 2022 베이징 올림픽에서 6위에 머문 리우는 만 16세 나이에 “이제 내 인생을 살아가려 한다”는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은퇴를 선언했다.

피겨와 작별한 리우는 2023년 UCLA에 합격해 심리학을 공부했고, 버킷리스트에 있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해발 5364m) 등반의 꿈도 이뤘다. 오랜만에 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가족과의 소중한 정도 다시 느꼈다. 그러다 스키를 타던 중 슬로프를 가르며 내려올 때 속도감이 자신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얼음 위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리우는 2024년 결국 스케이트화를 다시 꺼내 들었다.

미국 피겨스케이팅 선수 알리사 리우가 밀라노 아이스 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동계 올림픽 여자 피겨스케이팅 경기 시상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TASS 연합뉴스

복귀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성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것이다.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원하는 스케이팅을 자유롭게 펼치기로 마음먹었고, 남들과 다른 헤어스타일을 선택했으며 시즌 프로그램 구성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CNN은 “금빛 새장 속에 살던 리우가 비로소 새장을 깨고 나왔다”고 평가했다. 피겨의 즐거움을 되찾자 성적도 따라왔다. 지난해 세계선수권과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여자 싱글 우승을 차지한 그는 이번 올림픽 2관왕으로 ‘피겨 퀸’으로 우뚝 섰다. 아버지도 이날 관중석에서 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피겨 팬들은 리우를 한 번 더 밀라노에서 볼 수 있다. 의상 제한도 없고, 점수도 매기지 않는 갈라쇼 무대다. “올림픽에 오기 전부터 본 경기보다 갈라쇼가 더 기다려졌어요. 아주 멋진 드레스를 준비했으니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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