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인 듯, 공공미술인 듯…질문 끌어내는 '시의 공간'
[조성익의 인생 공간] 상암동 노을공원 ‘새로운 지층’
![벽과 지붕으로만 이루어진 상암동 노을공원의 ‘새로운 지층’. 나무·억새·하늘을 담는 액자 같은 건물이다. [사진 조성익]](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3/joongangsunday/20260223081644893ymoh.jpg)
건축가 김효영이 설계한 ‘새로운 지층’은 정확히 말하면 건물이 아니다. 건물과 공공 미술의 중간쯤에 있는 구조물이랄까. 벽과 지붕은 있지만 창문과 문이 없어서 어디부터 내부인지 어디부터 외부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무엇에 쓰라고 만든 건물인지도 알려주지 않는 이 건물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자연·인공 켜켜이 쌓인 노을공원 상징
그런데 의외였다. 어머니는 이 건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구석구석 살피며 한참 감탄하다가 한마디 했다. “이 건물은 시(詩)구나.” 어머니는 대학에서 시와 문학을 가르치시다 은퇴한 학자다. 시의 공간. 이 건축물을 설명하는 딱 맞는 표현이었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세상에는 시의 공간과 산문의 공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인 주택·사무실·카페·편의점 등은 산문의 공간이다. 산문은 완성된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 문장들이 인물·사건·배경을 제시하고, 기승전결의 사건으로 이어지며 이야기의 주제가 드러난다. 누구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이 산문의 공간이다. 반면 시의 공간은, 시가 그러하듯, 최소한의 언어로 쌓아 올린 집이다. 기능을 내세우기보다는 감각을 깨워주고, 답을 알려주기보다 질문을 유발하는 공간이다.
![[일러스트 조성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3/joongangsunday/20260223081645122lfsj.jpg)
소반의 상판 역할이라 할 수 있는 지붕은 마치 흙 무더기를 쌓아 놓은 듯, 경계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어 있다. 그 위로는 나무와 풀이 자란다. 아니, 자세히 보니 나무는 지면으로부터 솟아있고, 지붕에 둥근 구멍이 뚫려있어 그 구멍을 통해 하늘로 뻗는다. 그렇구나. 공중에 들어올려진 새로운 지층이 있고, 우리는 그 지층 밑을 오가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이 건물에 들어선 우리는 개미다. 지하 세계를 오가며, 위에 있는 지층을 올려다보고 있는. 이 건물은 우리를 흙 속 생명체로 만든다. 이 무슨 엉뚱한 상상인가 싶겠지만, 이것이 공간을 경험하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지층을 표현하기 위해 건축가는 흙을 다져 벽을 만들었다. 콘크리트 벽은 액체 상태의 콘크리트를 한 번에 부어 굳힌다. 빠르고 경제적이다. 반면 흙다짐벽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여러 번 흙을 부어야 한다. 지고의 지층이 생성되는 세월처럼, 시간을 들여 벽 위에 물결 무늬를 새겨 넣었다. 햇빛이 비치면 빛을 흡수한 지층 입자들이 벽에 표정을 부여한다. 한낮의 태양이 머리 위에 있을 때는 환한 표정이지만, 석양이 지며 태양이 서쪽으로 이동하면 표면의 그림자가 짙어지며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다. 시의 공간은 시간대 별로 여러 번 가봐야 한다.
노을공원은 쓰레기로 만든 공원이다. 난초가 피어나는 섬이었던 난지도는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버린 생활 쓰레기가 한 겹씩 쌓이며 지층을 이루고 언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인간의 노력을 들여 동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지층을 얹었다. 자연과 인공이 번갈아 쌓여 생명체의 모태가 된 장소가 이곳 노을 공원이다. 그래서 ‘새로운 지층’은 ‘땅의 기억을 들어올려’ 인공과 자연의 적층과 생명을 상징하려 했다는 해설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설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건축가는 시의 공간을 지었지만, 하나의 정답을 찾지 않는 이들을 환영한다.
![제주에 있는 풍 뮤지엄. 바람 소리에 집중하도록 설계한 이타미 준의 작품이다. [사진 조성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3/joongangsunday/20260223081645398bcoz.jpg)
나무로 만든 기다란 상자 같은 이 건물은 속이 텅 비어 있다. 사방의 나무 널빤지 사이로 난 촘촘한 틈새를 통해 바람이 통과한다. 여기서 바람은 시각을 넘어 청각과 촉각으로 변환된다. 눈에 보이지 않던 바람이 나무와 부딪치는 소리로 공간을 울리고, 살결을 스치는 서늘한 감촉으로 그 형체를 드러낸다. 아무것도 전시되지 않은 미술관, 기능적으로는 아무런 쓸모를 찾을 수 없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비로소 바람의 정체를 오감으로 느끼게 된다.
‘시는 이해하기 어려워’라고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시의 공간은 비교적 쉽게 감상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사실 묘사’다. 마음속으로 느낀 추상적인 감상에 앞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차분히 나열해보는 것이다. “벌판 위에 나무 상자가 놓여 있네.” “나뭇결이 거칠고 틈새로 빛이 가늘게 새어 들어오는구나.” 이처럼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건축가가 낸 수수께끼에 다가갈 수 있다. 사실적 묘사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정직한 첫걸음이다.
다음 단계는 ‘대상의 자기화’다. 눈 앞의 풍경에 개인적인 경험을 겹쳐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나는 어릴 적 하모니카를 배운 적이 있다. 풍 뮤지엄이 바람을 통과 시키며 내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거대한 하모니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하모니카 안에서 우리는 거인의 입김을 몸으로 맞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도 이 건물 안에 머물면서 바람과 관련된 추억을 떠올려보라. 누군가는 어릴 적 놀던 다락방에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오래된 성벽 틈에서 새어 나오던 바람을 떠올릴 것이다.
여전히 의문이 들 수 있다. 이 바쁜 세상에 오감과 추억은 뭐에 쓰려고? 논리로 짜여진 산문에 익숙한 우리는 머리로 이해하면 세상의 이치를 안다는 착각을 한다. 책을 읽고 뉴스를 보며 세상을 다 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시는 진실이라 굳게 믿었던 것 너머에 또 다른 진실이 있음을 알려준다. 인공지능이 빠르게 답을 찾아주고 온라인이 우리의 경험을 대신해주는 시대. 시의 공간은 매일 오르내리던 언덕을, 추워서 움츠리게 했던 바람을 또 다른 존재로 바라보게 한다. 논리에 더해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 폼페이 인근에 위치한 에르콜라노의 폐허가 된 주택. [사진 조성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3/joongangsunday/20260223081645668ljga.jpg)
기능 사라진 폐허의 건축이 주는 감동
집들은 돌로 벽을 세우고 나무로 지붕을 만들었기에, 벽은 남아 있고 지붕은 사라졌다. 폐허가 된 주택. 그 안에 들어서자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2000년의 풍화를 버틴 돌벽의 방. 그 위로 이탈리아의 푸른 하늘이 천장이 되어 있다. 좁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은 마치 연극 무대의 하이라이트 조명처럼 바닥에 강렬한 무늬를 새겼다.
폐허는 시다. 인간의 삶을 위해 지어진 공간이 기능을 잃어버렸을 때, 순수한 구조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불완전한 것, 결핍된 것은 때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영감을 준다. 많은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그리스와 이집트 고대 유적을 여행하며 영감을 받은 이유도 그것이다. 이들은 현대의 사물은 모든 기능이 딱딱 들어맞지만 인간적인 감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폐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사람이 손을 대어 지은 건물에 자연이 손길을 더한 모습. 인간이 지은 건물이 완벽함을 지향했다면, 자연은 거기에 불완전함을 더해 감동을 준다. 기능이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빛과 재료의 노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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