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서울대 출신 의사는 뉴욕에서 세탁소를 열었나”…한인 이민 120년의 숨겨진 기록(1) [홍키자의 美쿡]

7번 지하철 종착역 메인 스트리트에서 내리면 향신료와 한약재 냄새가 섞인 독특한 공기가 맞이합니다. 1917년 개통된 고가철로 위를 전철이 지나가는 굉음 사이로, 사람들이 바쁘게 오갑니다. 미국이면서 미국 같지 않은 거리입니다.

실제로 플러싱 거리의 간판을 보면 한글로 빼곡합니다. 메인 스트리트를 걷다 보면 한국 식당, 한국 병원, 한국 은행, 한국 부동산…. 마치 서울의 어느 번화가를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미국 한인 이민사의 출발점 중 하나인 플러싱, 한국인들은 이곳에서 ‘버티는 법’을 배웠습니다.
잠깐,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얼마나 살고 있을까요? 재외동포는 약 700만 명입니다. 대한민국 인구의 약 14% 수준으로 우리 민족 일곱 명 중 한 명은 해외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중 동포가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입니다. 약 260만 명, 재외동포의 3분의 1 이상이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 세 군데 있습니다. 로스앤젤레스(LA), 뉴욕, 뉴저지입니다.
특히 뉴욕 메트로폴리탄(뉴욕시와 그 주변 뉴저지·롱아일랜드·코네티컷 일부를 포함한 ‘대도시권’) 지역만 해도 20만 명이 넘습니다.

이들이 하와이에 간 이유는 ‘아메리칸 드림’의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사탕수수 농장 때문이었죠. 단순한 이민이 아니라 계약 노동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1876년 개항 이후, 외국 자본이 밀려들어 왔고, 전통 경제는 무너졌습니다. 쌀값은 폭등했고, 농민들은 땅을 잃었습니다. 특히 1901~1902년 사이, 한반도는 대흉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여기서 선택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이대로 굶어 죽거나, 아니면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한국인들은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고, 한국인들은 먹고살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밭으로 나가고, 저녁 6시에 돌아와 좁쌀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삶이었지만 이들은 버텼습니다. 이게 조선에서 굶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적어도 일한 만큼 돈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국인의 미국 이민은 성공을 찾기 위한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가난과 전쟁으로 무너지는 나라를 피해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 신화가 아니라 버티기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생존의 방식은, 시간이 지나며 바뀌기 시작합니다.

둘째, 가족 초청 이민이 허용됐습니다. 이미 미국에 있는 사람이 가족을 부를 수 있게 됐습니다.
셋째, 전문직 이민이 가능해졌습니다. 의사, 엔지니어, 교수 같은 고학력 전문가들이 들어올 수 있게 됐습니다.
실제로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는 1960년대부터 매 10년 마다 5배씩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1960년대 약 1만 명이었던 한인 수는 1980년대 약 35만 명까지 늘어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온 한국 이민자들의 학력 수준입니다. 당시 한국에서 대학 진학률은 10% 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온 한국 이민자 중 대졸 이상 비율은 40%가 넘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가난했지만, 교육열은 매우 높았습니다. 하지만 경제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고학력자들의 일자리가 부족했습니다. 의사, 엔지니어, 교수가 되어도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1969년부터 1971년까지 816명의 의사가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중 85%가 미국을 택했습니다. 어느 의대 졸업생은 “우리 1년 선배 67명이 졸업했는데, 그중 50명 가까이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라고 소회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들은 미국에 와서 청소와 세탁소를 해야 했습니다. 바로 ‘언어 장벽’ 때문입니다.

명문대를 나온 공학도가 뉴욕 맨해튼 오피스 빌딩을 청소했습니다. 의대를 나온 의사도 브루클린에서 세탁소를 열었죠. 결국 이들은 남의 밑에서 일하는 대신, 사장이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델리(간이 식당), 세탁소, 식료품점까지 작지만 내 가게를 여는 것이 이들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청과물 가게와 세탁소였을까요?
당시 뉴욕은 유대인들이 유통망을 꽉 잡고 있었습니다. 그 틈새를 한국인들은 ‘부지런함’이라는 무기로 파고들었습니다.

왜 한인들은 특히 이곳에서 버텨냈을까요?
첫째, 주거비입니다. 1970년대 플러싱의 집값은 맨해튼의 절반도 안 됐습니다. 월세도 저렴했습니다. 맨해튼에서 스튜디오에 월세 400달러를 내야 했다면, 플러싱에서는 200~250달러면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민 온 지 얼마 안 된 가족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둘째, 교통입니다. 7번 지하철 하나로 맨해튼까지 30분이면 갑니다. 차가 없어도, 영어를 못해도, 전철만 타면 일터로 갈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 한인 이민자 대부분은 차가 없었습니다. 운전면허도 없었고, 차를 살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중교통 접근성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넷째, 현금 경제입니다. 1970~1980년대 한국 이민자들은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크레딧 히스토리(신용 기록)가 없었습니다. 신용 기록이 없으면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없죠. 집을 사려고 해도, 가게를 열려고 해도 돈을 구할 수 없었죠.

이렇게 모은 돈으로 가게를 열었습니다. 델리, 세탁소, 식료품점. 계에서 1000달러를 받으면 델리 보증금을 냈고, 다음 달에 또 1000달러를 받으면 물건을 떼오는 식이었습니다.
계가 작동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서로 얼굴을 알아야 하고, 같은 동네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고, 같은 동네에 살고, 서로의 집을 알고, 자식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관계여야 했습니다. 계는 신뢰로 작동하는 시스템입니다. 누군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면 전체가 무너집니다.
커뮤니티가 곧 금융이었던 시대. 플러싱은 그렇게 자본을 만들어낸 곳이었습니다.
한인 1세대가 운영하던 가게들은 하나둘 중국계 자본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민자 승계의 패턴이 계속되는 것이죠.

플러싱은 미국에서의 삶을 시작한 곳이었지만, 늘 영원히 머무르겠다고 생각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플러싱에서 돈을 번 한인 1세대는 번 돈으로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습니다. 2세대인 자식들은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가 됐습니다. 그리고 1세대와 2세대는 더 이상 플러싱에 살지 않았습니다. 대신 더 나은 학군과 더 넓은 집, 더 안전한 동네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움직임의 방향은 명확했습니다. 허드슨강을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더 좋은 학군과 더 넓은 마당이 있는데다 더 조용한 동네는 강 건너에 있었죠. 그곳은 정착의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그곳에서 한인들은 단순히 정착한 게 아닙니다. 시장이 되고, 하원의원이 되고, 실리콘밸리의 CEO가 됐습니다.
플러싱에서 한국인들이 ‘버티는 법’을 배웠다면, 강 건너에서 한국인들은 ‘미국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더 이상 이민자가 아니라, 미국인이 되는 과정. 그 이야기는 강 건너에서 시작됩니다.
시리즈 <2부>에서 기사가 이어집니다.
“세탁소 집 아들은 어떻게 월가의 ‘왕’이 되었나?” 한인 이민 120년의 숨겨진 기록(2)
링크▶https://n.news.naver.com/article/009/0005639948?type=journal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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