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얼굴이 흐려질수록 더 보이는 것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근자에 정영창 화백의 초상 시리즈를 접했다. 초상화의 문법을 파괴하는 그림이라 어떤 이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얼굴을 중심으로 작업한 그림이므로 일단 '초상 시리즈' 혹은 '얼굴 연작'이라고 이름 붙여둔다. 페이스북에 공개하고 있는 그이의 작품들을 보며 보다 근원적인 시선을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 인사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I see you"라는 주제어를 제시한 것을 보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이가 함께 올린 정현종의 시 '방문객' 전문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댓글을 달았더니 답이 왔다. "그림들은 존재의 본질과 영혼에 대한 물음을 묻고 있는데 아바타가 생각나셨군요." 참고로 나는 정화백과 일면 일식도 없다. 하지만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이미 독자의 영역에서 진화한다.
지금의 내 얘기가 그러할 것이다. 영화 '아바타' 시리즈에서 반복되는 나비족의 인사말은 "I see you"이다. 직역하면 '나는 너를 본다'는 말이지만 보다 심오한 뜻을 품고 있다. 인간이었던 제이크가 나비족인 네이티리와 사랑에 빠져 나누는 인사말도 "I love you" 대신 "I see you"이다. 사랑의 더 깊은 형태, 그러니까 나는 너의 본모습을 알고, 너를 온전히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는 고백이다. 너의 내면과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 너의 됨됨이를 믿는다는 것, 본질의 이해, 존재의 인정, 연결과 책임, 사랑, 존경, 신뢰, 나아가 영혼의 교감을 모두 담아내는 가장 깊은 형태의 고백이 담긴 그윽한 환대이다.
수묵(水墨)의 절정, 정영창의 얼굴 연작이 말해주는 것들
나비족의 인사말이 단순한 시각적 언어를 넘어 본질적 이해를 표명하는 것이라면 정영창의 초상들은 얼굴이라는 시각적 언어를 통해 본질에 다가서는 작업일 수 있다.
이 초상들은 선명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으며 처절하게 부서진 흔적들을 품고 있다. 선후를 굳이 따지자면 식별 가능한 초상으로부터 점점 익명화되어가고, 종국에는 얼굴이 와해되며 액자만 남는 단계로 이행한다.
논문으로 쓴다면 개별 이미지들을 분석하겠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 갈음한다. 내가 주목한 것은 초상의 식별성이 단계적으로 박탈되는 과정이었다. 예컨대 푸틴처럼 선명한 타입이 등장해 대상을 특정하고 권위를 표지하며 기억을 고정시키는 즉, 초상화의 전통을 수행한다.
그런데 먹의 스밈과 번짐 기법을 통해 표정과 피부의 정보량을 시나브로 삭제하고, 마지막에 눈의 고정점만 남긴다. 일부이긴 하지만 최종 국면에서는 얼굴 자체가 사라지고 액자 프레임과 빗살무늬 같은 잔흔만 남긴다. 이때 초상은 더 이상 누구의 표상이 아니라 지워짐의 사건 자체가 된다.
여기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지워짐이 곧 무책임인가? 아니다. 대부분의 연작 시리즈에 오로지 눈동자만 선명하게 남기는 의도랄까, 어쩌면 작가가 의도하지 못한 잠재적 응답이 있을 수 있다. 이 시리즈를 보면서 느낄 잔혹과 당혹감은 얼굴을 지우면 지울수록 이면에 발생하는 무엇인가의 방향으로 관객들을 몰아간다는 증거다.
초상에 대한 정보가 적어질수록 관객들은 응답해야 할 자리에 서게 된다고나 할까?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현현(顯現) 즉, 얼굴은 눈, 코, 입의 데이터 정보가 아니라 나를 향해 응답하라고 요구하는 윤리적 메시지일 수 있다.
이는 메를로퐁티의 '눈과 마음' 즉, 회화의 세계와 몸의 얽힘으로 독해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다만, 여기까지는 내 공부가 덜 되어 있기 때문에 눈짓과 몸짓이 사유 이전의 원초적 체험을 보여주는 진정한 철학이라는 점만 언급해두고 차후를 기약한다.
이런 점에서 정화백의 연작 시리즈는 철학적 작업으로 풀이해도 좋겠다. 어쨌든 본래의 초상화 기법은 권위, 신분, 시대 등을 얼굴에 붙여두는 기술이었고 이게 고전적 기능이었다. 그런데 정영창의 기법은 이를 과도하게 무너뜨린다.
얼굴이 지워질수록 응시는 더 또렷해진다. 특정 인물을 선명하게 호출하는 지점으로부터 먹의 번짐과 스밈으로 그 식별성을 단계적으로 소거하고 마침내 얼굴 자체가 사라진 자리에 액자와 잔흔만 남긴다.
레비나스의 얼굴론에 기대어 해석하자면 이 초상은 기억의 고정이 아니라 지워짐의 사건으로 발전하고 관객은 이 초상이 누구인가를 넘어서 응답의 형식으로 그 앞에 설 수밖에 없게 된다.
얼굴을 지우는 방식으로 공동체에게 응답의 윤리를 주문하는 셈이다. 기회가 되면 차후에 이응노의 군상 시리즈와 홍성담의 걸개 시리즈를 견주어 설명해보겠다. 이들 모두 5·18과 강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질문의 향방과 응답의 윤리를 호출하기 때문이다.
남도인문학팁
광주 상무관 '검은비'에서 얼굴 연작 시리즈까지
정영창의 얼굴 연작은 재료적으로는 '수묵'의 범주에 위치한다. 동아시아 수묵화에서 먹의 농담은 형상을 살리거나 진경산수 등 이면을 살리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정영창은 먹을 농담과 번짐이 형상을 지우고 침식하는 방향으로 활용한다. 전혀 다른 방식인듯한데 수묵과 정화백의 얼굴 연작은 닮은 지점이 있다.
수묵이 지닌 비결정성, 여백, 완결을 거부하는 태도 등을 현대적 윤리의 장으로 이동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전통 수묵에서 여백이 자연과의 합일을 암시했다면 정화백의 여백은 사건 이후의 공백 즉, 말할 수 없게 된 자리를 암시한다.
여백이 더 이상 조화의 공간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공간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편으로는 동양 수묵의 미래지향적 담론을 생성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눈 주변에 강하게 응집되었다가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가는 먹의 흐름은 이 연작의 핵심적인 조형 문법이라고 생각된다.
눈은 끝까지 남아 관객 즉 응답해야 할 우리를 응시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조광제의 저술 '몸의 세계, 세계의 몸-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에 대한 강해'를 보면, 몸은 대상이 아니라 현상의 장을 여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정화백의 얼굴 연작에서 볼 수 있는 일련의 흐름 즉, 선명-와해-소거의 흐름을 의미의 붕괴가 아니라 현상의 조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환해줄 수 있는 근거라고 보았다.
얼굴이 재현의 정확도에서 멀어질수록 오히려 지각의 조건을 전경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전격 채용한 'I see you'가 정영창의 얼굴 연작에서 핵심 화두가 되었음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본다. 이 작품들이 일관되게 지향하는 것은 우리가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얼굴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선언일 수 있다. 관람자가 주체가 아니라 상호 인터랙티브한 존재라고나 할까.
이러한 응시의 역전이 주는 메시지는 생각보다 심오하다. 특히 근대 이후 민중들의 저항 서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독자들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메를로퐁티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얼굴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얼굴 특히 눈과 지각의 장을 공유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적으로 말하자면 얼굴이 설명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책임의 자리로 부르는 사건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