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 발명자는 장영실? 우린 모두 잘못 알고 있었다

유석재 기자 2026. 2. 20.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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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 2.0]
‘세종실록’의 명백한 기록 “세자가 고안했다”
KBS 사극 '대왕 세종'(2008)의 세자 이향(이상엽).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가 누적 관객 수 400만명을 돌파해 설 연휴 극장가의 승자가 됐다는 뉴스가 19일 나왔다. 왕위에서 쫓겨난 노산군(단종)과 인근 마을 촌장 엄흥도의 인간적인 관계와 비극적 결말이 그 내용이다. 젊은 관객들이 지닌 ‘청년의 권리를 기성세대가 불공정하게 빼앗는 것’에 대한 반발 심리가 흥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는 ‘축출된 군주가 백성들을 만나 새로운 감화를 받는다’는 설정을 위해 역사적 사실을 상당 부분 무시하거나 비틀었다. 실제 엄흥도는 단종의 감시자가 아니라 몰래 단종을 찾아가 위로한 충신이었으며, 그가 맡은 호장(戶長)은 마을 대표가 아니라 관아의 아전에 가까운 직책이었다. 사실상 섬과도 같은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은 유배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으나, 영화에선 수시로 자유롭게 엄흥도의 마을로 건너가는 억지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왼쪽·박지훈)과 엄흥도(유해진). /쇼박스

영화 속에서 백성을 만난 단종은 심지어 이런 말도 한다.

“측우기를 만든 사람은 노비였다. 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에게 배우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여기서 ‘노비’로 지칭된 사람은 세종 때 노비 출신의 과학기술자였던 장영실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장영실은 관기(官妓)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능력으로 종3품 벼슬인 상호군 자리에까지 올랐던 매우 드문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말 장영실이 측우기를 만들었나?

아니,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은 장영실이다’라는 진술은 맞는가? 아마 이 문장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역사적 상식처럼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조선 영조 때 만든 황동 측우기. 조선일보 자료사진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세종실록’ 1441년(세종 23년) 4월 29일의 기록을 보자.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 비가 올 때마다 땅을 파고 젖어 들어간 양을 봤다. 그러나 정확한 양을 알지 못했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둬 빗물이 그릇에 고인 양을 실험했다.’(近年以來, 世子憂旱, 每當雨後, 入土分數, 掘地見之. 然未可的知分數, 故鑄銅爲器, 置於宮中, 以驗雨水盛器分數)

세자라니? 그렇다. 세종의 큰아들이자 세자였던 이향. 훗날 5대 임금인 문종(재위 1450~1452)이 되는 그 사람이자 단종의 아버지다. 병약해서 일찍 죽은 임금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왕세자로 29년 4개월을 있었기 때문에 조선 왕세자들 중 순종(황태자 기간 포함 32년 5개월)과 경종(29년 11개월)에 이어 셋째 순위다. 세자 시절 문종은 부왕을 대신해서 대리청정을 함으로써 국정을 맡기도 했다. 세종 만년 5년 동안을 사실상 문종의 치세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니까 영화 속 단종의 그 대사 안에는 측우기의 진짜 발명자가 등장하는 셈이다.

세자 이향은 ‘땅에 빗물이 스민 깊이는 토양의 습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빗물의 양을 정확히 잴 수 없다’는 고민 끝에 측우기를 고안한 것이다.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442년 5월 8일 측우기를 이용한 전국적인 우량 관측과 보고 제도가 확립됐다. 강우량 측정 도구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고 하지만, 국가에서 쓰는 표준화된 측우기는 최초였다고 한다.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한 것처럼 잘못 소개한 그림책.

그런데 도대체 왜 사람들은 ‘측우기의 발명자는 장영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일까? 나도 학창 시절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이상한 삼단 논법이 적용된 것 같다.

① 측우기는 세종 때의 발명품이다.

② 세종 때의 과학자는 장영실이다.

③ 그러므로 측우기의 발명자는 장영실이다.

세종 때 과학자는 장영실만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①은 ②의 충분 조건이 되지 않기 때문에 ③을 도출할 수 없다. 아마도 논리학 과목을 수강할 때 시험에서 이런 논리를 전개했다가는 F학점을 맞았을 테지만, 의외로 사람들의 기억에는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던 것 같다. 장영실은 천문 관측 기구인 혼천의,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측우기는 아니다. 일각에선 장영실이 과학자보다는 기술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한 것처럼 잘못 소개한 파워포인트 교재.

영화 속 그 대사에 대해 ‘측우기를 고안한 사람은 문종이더라도 실제 제작에 참여한 사람은 장영실이었다는 뜻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노비나 천민이 만들지 않은 조선 시대 물건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단종의 대사는 그런 뜻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현대로 옮겨 이런 예를 들어 보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시공에 참여했던 사람이 “DDP 그거, 자하 하디드가 지은 게 아니라 사실 내가 만든 건물이야”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세종 때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은 장영실이 아니라 훗날 문종 임금이 되는 세자 이향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더라도 잘못된 지식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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