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결과 순수의 이름으로 탄압하고 배제한 ‘종교개혁’ [.txt]

한겨레 2026. 2. 20.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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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시대적 요구가 낳은 취약한 영웅
‘가톨릭-프로테스탄트 대립’ 본질 아냐
‘근대 형성’ 기여했지만 한계도 성찰해야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가 그린 ‘종교재판소’. 스페인 종교재판의 잔혹성과 위선을 고발한 이 작품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힌 이들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심문받고 있다. 재판관과 군중은 침묵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고야는 어두운 색조와 강한 명암 대비를 통해 종교적 광신과 권력의 폭력을 비판했는데, 이를 통해 신앙이 권위의 도구로 타락한 현실을 고발하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양심을 옹호했다. 길 제공, 위키미디어 코먼스

‘종교개혁, 중세에서 근대로의 역사적 대전환’은 특정한 종교적 신념의 생성과 강조로 인한 불관용의 제도화, 사회 규율과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관점으로 유럽의 종교개혁을 해석한 한국인 학자의 저작이다.

저자는 먼저 자신의 학문적 주소지를 밝히고, 종교개혁을 16세기 유럽의 주요 국가와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종교적 격변 전체를 포괄하는 역사적 개념으로 설정한다. “나는 유럽 중세사가이다. 전공한 시대는 종교개혁 한 세기 전인 15세기이다. 중세사가로서 나에게는 중세와의 연속성 속에서 종교개혁기를 유럽사 전반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해의 관건은 ‘프로테스탄트냐, 가톨릭이냐’가 아니다. 루터와 독일, 취리히, 급진파, 칼뱅과 제네바 등 개혁가들이 주도한 아래로부터의 상향식 개혁이었는가, 국왕‧교황‧주교 등 기성 권력이 이끈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스페인, 가톨릭 종교개혁 등 하향식 개혁이었는가에 있다. 기존 연구서들의 종파적 구분과 떨어져 있다.

종교개혁, 중세에서 근대로의 역사적 대전환 l 최종원 지음, 길, 8만원

1517년 10월31일, 한 젊은 수사가 독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95개 논제를 못 박는다. 종교개혁의 출발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독일에서 ‘면벌부’ 판매는 교황이 발행을 승인하고 황제‧제후‧대주교 등 세속 군주와 지역 교회가 유통시키는 협력 사업이었다. 황제권이 취약한 독일의 분열된 정치 지형에서, 교황이 지역 교회까지 직접 통제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다.

루터는 95개 논제에서 면벌부 제도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다. 교황의 권위와 교회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교황이 공덕을 매매할 정당한 권한이 있는지, 교회 통치권이 죽은 자들에게까지 행사될 수 있는지 등 신학적 질문을 던졌다. 루터의 뜻과 무관하게 95개 논제는 뜨거운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교황권의 영적‧재정적 폭정에서 독일을 해방시킨다는 목표 아래 교회 개혁 요구가 커져 가던 차에, 루터가 개혁의 선도자로 떠오른 것이다.

“루터는 흔들림 없는 영웅이나 단호한 혁신가가 아니었다. 루터는 영웅이기를 거부한 인물이었다. 자기 소명에 충실했지만 자신의 한계와도 싸워야 했다. 때로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취약한 면모를 드러냈다. 그의 불완전함과 한계, 내적 갈등이 종교개혁을 다층적, 복수적인 서사로 읽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종교개혁의 구도는 루터라는 영웅이 이끈 반가톨릭교회와 부패한 가톨릭교회의 대립이 아니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에는 교파와 무관하게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는 열정이 각지에 퍼져 있었다.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지역 모두에서 다양하게 일어난 복수의 종교운동이자, 국왕권 강화와 가톨릭교회의 분열 및 그것에 기반한 교회개혁 움직임”이다.

가톨릭에서 분리되면서 유럽 그리스도교의 구심점을 약화시킨 프로테스탄트 진영도 계속 분열되고 세속 군주의 교회 통제력이 강화됐다.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의 의도와는 당연히 무관하게, 종교가 점차 국가에 귀속되어 갔다.

종교개혁은 “인쇄기를 활용해 대중 운동을 형성하려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이루어진 최초의 대규모 미디어 캠페인”이다. 인쇄술은 종교개혁 확산을 도왔지만 저자는 인쇄술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한다. 당시 인쇄술의 성격은 오늘날 인터넷과 비슷하다. 루터의 저작이 인쇄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등, 같은 성격의 정보만 흡수하는 확증 편향 강화가 두드러졌다. 16세기의 인쇄술도 괴담과 거짓 소문 확산과 선동의 도구로 작동했다.

종교개혁은 개인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관용을 앞당겼는가? 저자의 대답은 신랄하다.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게 들수록 불관용의 목소리와 실행이 커져갔다. 종교개혁은 외부자들에게는 평화와 개혁을 빌미 삼은 탄압과 박해, 배제였다. 종교개혁의 역사는 정결과 순수를 앞세워 불관용을 강제하는 역사일지 모른다.”

세속 군주는 통치의 안정을 지키려고 제한적이나마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려 했다. 각자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한, 종파 간 분열은 막을 수 없었다. 자유를 대가로 분열을 치러야 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역설이다.

파스콸레 카티(1550~1620)가 1588년에 그린 ‘트리엔트 공의회’. 그림 위쪽에는 추기경들과 주교들, 신학자들이 치열하게 토론하고 있고, 아래쪽에는 교의와 신학을 의인화한 인물들이 등장해 악과 무지를 제압하고 있다. 십자가를 들고 교황의 삼중관을 쓴 여성은 교회를 의인화했고, 갑옷을 입은 인물은 ‘믿음을 수호하는 교리’를 나타낸다. 이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의 혼란을 딛고 정통 신앙을 회복했음을 대내외적으로 표방했다. 길 제공, 위키미디어 코먼스

종교 갈등으로 시작되어 패권 투쟁이 된 ‘30년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막을 내렸다. 조약은 ‘통치자의 종교가 영토의 종교’라는 원칙을 재확인하고 통치자의 종교를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개인에게 영토 바깥으로 이주할 수 있는 권리, 곧 제한적인 관용을 베풀었다.

“국가가 여러 종파의 공존을 인정하게 된 것은 종교적 배타성에서 비롯된 내전이 긴 교착에 빠지곤 했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와 관용은 종교적 불일치로 인한 혼란을 관리하는 국가의 통치 수단이었다.” 종교개혁은 자유와 관용의 역설적 동력이자 종파 간 투쟁과 불관용의 동력, 곧 이중적 동력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비전 제시, 자유로운 탐구와 종교적 자기 결정권의 진작, 민주주의 제도 확립과 종교의 비정치화에 대한 기여. 이렇게 종교개혁을 유럽이 중세와 결별하고 새로운 세계를 연 출발점으로, 과거의 종착지이자 미래의 출발점으로 보는 관점은 큰 도전을 받으면서도 “과거가 드리우는 피할 길 없는 긴 그림자”로 남아 있다.

루터를 독일 민족의 영웅으로, 종교개혁을 프로테스탄트의 승리로 보는 19세기의 해석이 시효를 다한 뒤, 종교개혁을 자율적 시민의식 형성과 관련짓고 근대화를 향한 단계이자 시민사회의 시작으로 보는 해석이 유력해졌다. 최근에는 이런 해석이 근대성 자체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해체되고 있다. 예컨대 근대의 권력에 대한 미셸 푸코의 통찰을 빌린다면, 종교개혁은 개인이 자기를 통제하고 스스로를 감시하는 미시적 규율 권력을 발전시켰다.

종교개혁을 근대와 직접 연동시키려는 해석이 해체되는 이유를 저자는 “유럽인들이 자명한 공리처럼 여기던 합리성과 진보로서의 근대와 근대성이 20세기에 처절하게 붕괴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이 근대 형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는 유효하지만, 어떤 근대였는지 물어야 평가가 제대로 성립된다. “근대성의 종말 앞에서 종교개혁의 책임과 한계를 성찰하고 재조명하는 것은 역사가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당위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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