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택의 그림 에세이 붓으로 그리는 이상향] 92. 고향에 대하여

이광택 2026. 2. 20.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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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나와 우리들의 과거가 있는 곳,
공간과 시간과 마음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복합적인 관계로 굳어진 곳…….
고향에 대한 회상은 시간이 가도 이상하게 마음속을 아슴아슴한 정취로 채우고 몽상으로 꿈꾸게 한다.
고향을 생각하면 슬픔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다정함·그리움·애달픔…정감으로 가슴에 감겨오는 말

오래전, 읽고 메모해 둔 김동인의 ‘붉은 산’ 내용은 이렇다.

1933년 만주로 풍토병을 조사하러 간 여(余)라는 의사의 수기 형식 단편소설로, 무대는 만주의 어느 한국인 마을. 이곳의 한국인들은 고향 땅을 등진 실향민들이다. 여기에 천하의 악질인 파락호(행세하는 집의 자손으로서 허랑하고 방탕한 사람)요 팔난봉인 ‘삵’이 등장한다. 이 ‘삵’은 갖은 악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난데없이 민족의 의분이 끓어올라서 중국인 지주와 싸우게 되는데, 어찌나 얻어맞았던지 허리가 기역 자로 부러진 채 밭고랑에 처박힌다. 그는 죽어가면서 이렇게 동포들에게 부탁한다.

“붉은 산과 흰옷이 보고 싶소. 애국가를 불러주오!”

아무리 악인이라도 고향과 그것의 확대 개념인 조국에 대한 정은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고향 땅에 묻힐 수 없는 ‘삵’의 비극. 확대해석하면 그것은 바로 민족 항일시대의 모든 한국인이 처한 삶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고복수의 ‘타항살이’와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그리고 세월이 흘러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대중가요가 왜 우리 민족의 가슴을 후벼 파며 크게 사랑받았는지 그 이유를 알 만하다. 정지용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향수’ 역시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요이다. 무릇 한국인에게 생명력이 긴 애창곡이 되려면 모두 ‘어머니, 고향, 사랑’을 노래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 나라의 음악은 곧 그 땅에서 삶을 꾸려 온 백성들의 희로애락의 총화(叢話)가 아닌가.

워낙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수없이 당한 역사를 가져서일까. 우리 민족에겐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보름달에서 깎일 대로 깎인 초승달을 보듯 슬픔과 정한(情恨)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우리의 민요 ‘아리랑’을 들으면 이내 느껴지지 않는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다양한 형태로 불린 아리랑 안에서의 고향은 ‘임이시여 제발 고향을 떠나지 말라’는 내용이 주종을 이룬다. 고향에는 부모, 임, 인정 같은 것이 있거늘 어찌하여 낯설고 물선 곳으로 가는가라는 만류와 함께, 떠나는 사람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 들어있다. 낯선 고장에 가면 천대받기 쉬우며 고생이 심하다는 의미로 ‘고향을 떠나면 천하다’라는 속담도 그래서 나왔나 보다.
▲이광택 작 ‘마음 속 4월 모임’

지구촌 사회에서 벌어졌던 이별이란 게 다들 아팠겠지만, 우리네 ‘아리랑’의 이별만큼 ‘쓰리고 아린’ 것이 또 있을까. 오죽했으면 이 ‘아리고 쓰림’이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이라는 노래의 후렴구가 되었으며 얼마나 아리고 또 아렸으면 ‘아리랑’이 되었겠는가! 김소월의 ‘진달래꽃’, 고려가요 ‘가시리’, ‘서경별곡’ 역시 결국은 고향에 있는 임에게 떠나지 말아 달라는 당부이다.

한국의 미술 중 고향 이미지는 우리에게 하나의 독특한 스타일로 사랑받았으니, 그것이 곧 일명 ‘이발소 그림’이다. 박이 오른 초가, 활처럼 굽은 흙담, 잘 자란 벼, 지게에 나뭇단을 짊어진 농부, 머리 땋은 순이가 김매는 밭, 담배 문 할아버지, 닭과 서리병아리와 토종 쌀개, 나무다리가 놓인 냇물에서 빨래하는 아낙, 물레방아, 원경의 눈 덮인 산…….

수많은 화가가 고향을 그렸고 지금도 그리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향’이란 단어만큼 한국인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과 애달픔이라는 정감으로 가슴에 감겨오는 말이 또 있겠는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나와 우리들의 과거가 있는 곳, 공간과 시간과 마음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복합적인 관계로 굳어진 곳……. 낡고 스산하긴 했지만, 시대의 아득한 저편, 고향에 대한 회상은 시간이 가도 이상하게 마음속을 아슴아슴한 정취로 채우고 몽상으로 꿈꾸게 한다. 고향을 생각하면 슬픔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2월 초순의 늦은 밤, 눈이 고요히 내린다. 이렇게 흐뭇한 겨울밤이면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노영달, 정씨, 그리고 백화. 소설 내내 등 뒤로 하염없이 눈발은 날리고 그들의 발길은 애틋하게 고향을 향하지 않는가.

하여튼 어디서든지 고향은 강아지처럼 한국인, 우리를 따라다닌다.[끝]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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