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수진의시네마포커스] 가족이 떠안은 내전의 상처

2026. 2. 1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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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걸작의 반열에 오르는 미완성의 작품이 있다.

빅토르 에리세의 '남쪽'이 그런 영화이다.

빅토르 에리세는 스페인 내전의 상처를 그린 '벌집의 정령'(1973)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고 10년 뒤 '남쪽'(1983)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영화 '남쪽'은 '벌집의 정령'의 연장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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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걸작의 반열에 오르는 미완성의 작품이 있다. 빅토르 에리세의 ‘남쪽’이 그런 영화이다. 빅토르 에리세는 스페인 내전의 상처를 그린 ‘벌집의 정령’(1973)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고 10년 뒤 ‘남쪽’(1983)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애초에 영화는 180분 분량으로 기획되었지만 제작자의 느닷없는 결정으로 영화 절반을 촬영했을 때 중단되었다. 스페인 북부에서 전반부를, 남부에서 후반부를 찍으려던 감독의 계획은 무산되었고 북부에서 촬영된 분량만으로 편집된 90분짜리 영화로 공개되었다. 감독은 두고두고 영화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지만 이 영화는 이 90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기억해야 할 영화가 되었다.
그가 데뷔작 ‘벌집의 정령’을 완성한 시기는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30년이 더 지난 때였다. 스페인의 20세기를 상징하는 프랑코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움츠렸던 영화인들이 용감하게 내전의 승리자들이 윤색해 온 역사를 드러내려는 노력을 본격화하던 시점이다. 내전 이후 어떤 이들은 해외 망명의 길을 택했고 어떤 이들은 스페인에 남아 승리한 체제가 강요하는 침묵과 공포를 견디며 그 시간을 살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빅토르 에리세가 그런 사람이다.
영화 ‘남쪽’은 ‘벌집의 정령’의 연장선상에 있다. 시간적 배경은 1957년. 아구스틴, 훌리아 부부는 어린 딸 에스트레야와 함께 스페인 북부의 도시와 시골의 경계에 있는 조용한 집에 살고 있다. 딸은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엄마가 알려준 약간의 이야기로 아빠가 남쪽 출신이고 할아버지와 크게 싸운 뒤로 교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그녀에게 남쪽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지의 세상과 같은 곳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첫 영성체를 맞아 남부에서 친할머니와 밀라그로스 할머니가 아버지의 집을 방문한다. 밀라그로스가 들려주는 파편적인 이야기를 통해 소녀는 아버지 가족이 겪은 내전의 상처와 고통을 좀 더 알게 되지만 소녀가 이해하기에 그것은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완고한 침묵을 유지한 채 출구 없는 터널 속에 갇혀 있다.

그 후 에스트레야는 우연히 아버지의 놀라운 비밀을 발견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번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부녀간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의 대립 속에서 에스트레야는 자신의 방식으로 나 홀로 성장하기를 택한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용기를 내어 화해의 손을 내밀지만 그녀는 거부한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진실을 들을 기회를 영원히 상실했을 때 그녀는 남쪽행을 결심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둘러싼 이야기의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알 수 없다. 영화는 딸의 주관적 시점과 그녀의 시점을 벗어난 전지적 시점 두 가지로 전개되지만, 전지적 시점으로 보이는 것 역시 객관적 사실인지 아니면 그 역시 딸의 상상인지 분명하지 않다. 역사의 재건이 잃어버린 기억의 복원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면 이 부녀에게 역사를 다시 쓸 기회의 문은 거의 닫힌 셈이다. 아버지는 침묵으로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드러냈지만 딸은 아버지를 상실한 자리에서 뒤늦게 기억의 흔적을 추적해야 한다. 영화는 진실을 명백하게 말해주지 않지만, 베르메르와 카라바지오를 연상시키는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미장센을 통해 가족이 떠안은 내밀한 상처를 섬세하고 고통스럽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맹수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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