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언어는 어디서 잉태돼, 어떻게 세상에 서나[책과 삶]
김혜순 지음
문학과지성사 | 330쪽 | 1만8000원

“문학의 복화술은 흉내 내기가 아니라 맞물려 서로를 잉태하는 것”
‘여성이 글을 쓰고, 여성이 시를 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과 답변
한국 현대시 영토를 세계적으로 확장해온 시인의 문학 세계 오롯이
시인 김혜순이 출판사에 근무할 때다. 독재 정권 말기, 국내에서 출간되는 모든 출판물을 정부가 먼저 검열하던 시기다. 출판할 수 없는 글들에 검은색 콜타르가 가득 칠해져 돌아왔다. 어느 날 시인이 경찰서로 불려갔다. 형사는 문제가 된 책의 번역자가 사는 집의 주소를 대라며 김혜순의 뺨을 때렸다. 일곱 대. “몰라요.” 집으로 돌아온 김혜순은 그다음 날부터 출판사를 결근하고 뺨 한 대에 시 한 편씩, 일곱 편을 썼다. ‘그곳’ 연작이다.
“그곳, 불이 환한/ 그림자조차 데리고 들어갈 수 없는/ 눈을 감고 있어도 환한/ 잠 속에서도 제 두개골 펄떡거리는 것이/ 보이는, 환한/ 그곳, 세계 제일의 창작소…”(<어느 별의 지옥> 수록작 ‘그곳1’ 중)
2023년 베를린 시 축제에서 김혜순이 한 기조연설인 ‘Tongueless Mother Tongue’(혀 없는 모국어)에 그가 편집자로 일하던 때의 일화가 담겼다. 글에서 시인은 또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인인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왜 시를 쓰냐고, 이게 다 무슨 뜻이냐고’ 질문을 받으면 여기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서, 여기서 죽지 않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어서, 유령이 된 내 목소리가 자꾸만 생성되는 유령을 구축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시는 죽음이라고,”
<공중의 복화술>은 1979년 ‘문학과지성’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올해로 47년째 시 쓰기를 지속해온 김혜순의 시론집이다. 그가 문예지 ‘Axt’(악스트)에 연재한 산문 13편과 ‘Tongueless Mother Tongue’ 등 국내외 강연 및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한 산문 가운데 6편을 추려 묶었다. 국내 문학상을 비롯해 해외에서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독일 국제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지난해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AAAS) 회원으로 선정되는 등 한국 현대시의 영토를 세계적으로 확장해나가고 있는 시인의 문학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이다.
시인은 악스트에 연재를 시작하며 ‘문학은 어디서 시작할까’를 화두로 삼아 글을 써나갔다고 했다. 그 중심에 ‘복화술’이라는 단어가 놓인다. “문학작품의 내부에는 복화술사가 산다. 복화술은 속임수다. 작가는 우선 스스로를 속인다. 작가는 작품 속 화자가 자신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 소설은 현실이라고 지정된 것에 대한 거짓말이고, 시는 언어라고 지정된 것의 거짓말이다.”
작가라는 존재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경험을 내부의 목소리로 바꾸어 낸다. “나의 상상적 경험이 신체화되면서 나의 몸이 자연과 단절 없이 생성의 장에 있게 된다.” 그리고 이때 문학의 복화술이란 “흉내 내기가 아니라 맞물려 서로를 잉태”하기다. 시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집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을 쓰며 “끝없이 새를 불러내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공중에서 떨어져 죽게 되는 새를 생각했다. 저 공중의 복화술을 생각했다. 우리 생명체들과 사물들의 입술로 복화하는 죽임당한 이들을 생각했다.”
시인이 그간 시집과 산문집, 시론집 등에서 지속적으로 건네왔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과 ‘여성이 시를 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과 그 답변, 나에서 엄마, 할머니로 연결되는 여성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책 전반에 녹아 있다. “여성적 글쓰기의 대표적인 특징은 ‘관계’다. 그중에서도 여자와 여자의 관계, 엄마와 딸의 관계, 죽은 엄마와 딸의 관계다. 엄마가 딸이 되고, 딸이 엄마가 될 때까지 밀고 나가는 관계다. 시를 쓰는 동안 엄마는 엄마를 잃고, 딸은 딸을 잃는다. 결국 시는 정체성 상실을 문자화한다.”
시인은 타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몸 안에서 복화술로 구현해 세상으로 내보인다고 하지만, 이는 자신을 혹은 자신 안의 여성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자짐승은 나라는 타자의 타자인 것. 불쌍한 것. 나는 내 글쓰기로 이 여자짐승을 구성해간다. 나의 시 한 편 한 편이 이 여자짐승 하나의 발가벗은 알몸을 구성하기에 이르도록 한다.”
김혜순 시인은 이번 책에 실린 글들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문학적 글쓰기를 시작하는 이들이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의 언어가 어디에서 잉태돼 어떤 과정을 통해 발화되고 세상에서 서게 되는지를 김혜순 언어를 통해 따라가볼 수 있는 책이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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