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은 옮기고 입은 막았나... 쿠쿠홈시스의 '두 얼굴'

손유지 2026. 2. 19. 19:3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현장 리포트] 노조활동 조준한 ‘일감 박탈’ 논란
해고·지점 이전까지... 조합원 생계 위협 심화
‘소사장제’로 고용 책임 회피... 위장자영업 의혹
근로감독·제도개선 시급.... 반복 막을 구조개혁 필요

[지데일리] 노조 가입 이유로 일터를 잃는다면, 과연 ‘노동의 자유’는 어디에 있을까.

생활가전업체 쿠쿠홈시스를 둘러싼 노동 탄압 의혹이 다시금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가전 설치·서비스 기업 중 하나인 쿠쿠홈시스가 자사 설치기사들의 노동조합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폭로가 제기되면서, 대기업 위탁 구조 속 비정규직 종사자들의 권리 침해 실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쿠쿠홈시스가 노조 활동을 이유로 조합원에게 일감을 빼앗고 해고를 통보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노조는 위장 자영업 구조 속 노조 탄압을 중단하고 강력한 근로감독을 촉구했다. 쿠쿠 공식 홈페이지 참조 AI생성

전국가전통신서비스노동조합 쿠쿠설치서비스지부(노조)는 19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쿠쿠홈시스가 노조를 결성한 기사들에게 일감을 빼앗고, 부당해고를 통보하는 등 불법적인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며 근로감독의 철저한 시행을 촉구했다. 현장에는 다수의 조합원과 연대 단체가 모여 ‘노조 탄압 중단’과 ‘실효성 있는 감독’을 외쳤다.

노조에 따르면 지난달 21일과 22일 노조는 쿠쿠홈시스 본사 및 위탁 대리점 3곳을 상대로 첫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측은 교섭 공고를 뒤로 미루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교섭에 참여한 노조 임원 2명에게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했다. 사측은 “서비스 품질 저하”를 이유로 들었지만,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노조는 이를 ‘노조 참여자 솎아내기’로 규정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쿠쿠홈시스는 조합원이 근무 중인 기존 지점 인근에 새 지점을 신설하고, 주요 업무 물량을 신설 지점으로 옮기고 있다. 조합원들이 수행하던 설치와 수리 업무가 사실상 다른 인력에게 넘어가면서, 조합원들의 수입은 급격히 줄었다는 것이다. 일부 기사들은 월평균 수입이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고 호소한다.

쿠쿠설치서비스지부 윤찬희 지부장은 기자회견에서 “회사가 신규 지점을 늘리고 인력을 새로 뽑는 것은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다. 노조가 파업을 하더라도 대체 인력을 투입해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기존 조합원을 자연스럽게 배제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쿠쿠홈시스가 대체 인력을 키워 노조 무력화를 시도하는 것은 명백히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정재헌 수석부지부장의 사례는 개인의 생계를 위협받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10년간 쿠쿠 설치기사로 일해왔지만, 노조 설립에 참여한 이후 ‘서비스 품질 저하’라는 이유로 단 이틀 만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며 “회사에 항의했지만 별다른 답변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노동청 진정 절차가 진행 중이지만, 그 사이에도 생계는 중단 상태라는 게 그의 하소연이다.

또 다른 핵심 쟁점은 ‘고용 형태’다. 쿠쿠홈시스는 이른바 ‘소사장제’ 구조를 통해 설치기사들을 독립사업자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명목상 ‘개인사업자’ 신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회사의 지시 체계 아래에서 정해진 유니폼을 입고, 지정된 기준에 따라 근무한다. 즉 외형상은 자영업자지만 내용상으로는 ‘노동자’인 구조다. 최근 몇 년 동안 플랫폼 택시, 배달 기사, 가전 설치기사 등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가짜 3.3(위장 자영업)’ 문제가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조 관계자는 “쿠쿠홈시스는 근로기준법상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위탁계약 방식으로 노동을 쪼개고 있다”며 “설치기사들이 사실상 고용돼 있음에도 사회보험 가입도 안 되고, 퇴직금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해고의 통보조차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계약 종료나 물량조정이라는 명목만으로 사실상 해고가 이뤄진다.

고용노동부는 이미 해당 사안을 인지하고 지난 12일부터 쿠쿠홈시스 및 대리점들에 대한 근로감독을 실시하고 있다. 현장 점검 중 일부 위탁 계약의 불법성 여부를 조사하고 있으며, 조합 활동 방해 정황이 확인될 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위반으로 사법기관에 의뢰할 가능성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노조 측은 정부의 대응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이미 회사 측에서 ‘당국에 적발돼도 법인을 없애고 새로 세우면 된다’는 식의 발언을 해왔다는 것이다. 즉, 벌금형이나 시정 명령이 내려져도 법인을 폐업하고 재설립하며 제재를 회피하는 ‘껍데기 바꾸기’가 가능하다는 구조적 허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한 가전 서비스 업체의 내부 갈등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노동 탄압의 사각지대’를 보여준다는 평가다. 대기업 브랜드를 뒤에서 받치는 수많은 위탁 기사들이 사실상 프랜차이즈형 종속 구조 속에서 일하고 있지만, 정규직 노동자와는 다른 법적 보호를 받는다. 이러한 구조에서 노조 활동은 ‘생존을 건 선택’이 되기 일쑤다.

노동 전문가들은 쿠쿠홈시스 사례가 단일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전반의 경향을 반영한다고 진단한다. 한 노동사회학 연구자는 “최근 몇 년 사이 제조·서비스 분야 대기업들이 설치, 배송, 수리 등 부문을 외주화하면서 노동통제는 그대로 두고 비용만 절감하는 구조를 고착화시켰다”며 “이 과정에서 노조 활동을 원천 차단하거나 간접고용 구조를 통해 책임을 분산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부의 근로감독 제도 역시 이러한 위장 도급 구조를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도급계약과 위탁계약의 경계를 악용하면 사용자의 책임을 피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행 근로감독 체계는 각 사업장 단위로 이뤄지지만, 실제 권한은 본사에 집중되어 있어 ‘실질적 사용자’에 대한 제재가 미비하다는 점도 문제다.

다만 최근 들어 여론과 사회 감시가 높아지면서 변화의 신호도 감지된다. 플랫폼 노동자와 같이 ‘비정형 노동자’의 권리 보장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산되고, ‘특수고용직’의 근로자성 인정 사례도 법원에서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쿠쿠홈시스 사안은 앞으로의 노동정책 방향을 가늠할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논쟁의 핵심은 ‘노동조합의 실질적 권리 보장’이다. 법이 규정한 단체교섭권과 단결권이 위탁 구조 속에서도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다면, 노동기본권은 종이 위의 약속에 불과하다. 노동부의 철저한 조사와 함께 국회와 정부가 위장 자영업 구조에 대한 제도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노조 측은 이번 주 내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도 공식 진정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아울러 향후 대규모 집회와 추가 고발을 예고하며 “이번 사안이 단순한 회사 문제로 묻히지 않도록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쿠쿠홈시스 사태는 노동 현실의 ‘그늘’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노동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존중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위탁과 외주의 경계를 넘어선 책임 구조를 세우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쿠쿠 사태는 언제든 반복될 것이란 게 노동계의 중론이다.

노동계 한 관계자는 "지금 필요한 건 땜질식 행정처분이 아니라 ‘노동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근본적인 제도 개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