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지배하는 표준…K 패스너 전략 [임창기의 피지컬 AI와 패스너]

20세기 제조업의 패권은 완성품이 아니라 표준에서 시작됐다. 표준은 도면의 규격을 넘어 산업의 질서를 만드는 힘이었다. 어떤 나라는 기술을 팔았고 어떤 나라는 기준을 팔았다. 결과는 분명했다. 기준을 가진 국가가 시장 구조를 설계했다.
19세기 영국은 Joseph Whitworth가 제안한 휘트워스 나사 표준을 통해 기계 부품의 호환성을 확보했다. 철도와 조선, 군수 산업까지 동일 규격이 적용되면서 부품 교체와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규격 통일은 생산비를 낮추고 품질을 안정시켰다. 영국은 표준을 통해 산업혁명의 속도를 높였다. 표준이 곧 국가 경쟁력이었다.
미국은 1930년대 Henry F. Phillips가 상용화한 십자 체결 규격을 자동차 산업에 도입하며 자동화 조립 시대를 열었다. 드라이버와 체결부가 스스로 정렬되는 구조는 생산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였다. 미국 자동차 공장은 짧은 시간 안에 생산 효율을 극대화했고 스크류 산업 전반이 해당 규격으로 재편됐다. 표준은 한 기업의 발명이 아니라 국가 산업 구조를 바꾸는 촉매였다.
1960년대 등장한 Torx 규격은 고토크와 고정밀 자동화에 최적화되며 항공과 전자 산업에서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체결 오차가 줄어들면서 제품 신뢰성이 향상됐고 글로벌 공급망에서 채택이 확산됐다. 표준을 선점한 기업과 국가는 지속적인 라이선스 수익과 시장 지배력을 확보했다.
일본은 전후 Japanese Industrial Standards 체계를 정비하며 제조의 언어를 국가 차원에서 통일했다. 부품 규격과 품질 기준이 표준화되자 협력 업체 간 호환성이 높아졌고 공급망은 안정됐다. 중소기업도 동일 기준 아래에서 품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표준은 산업 생태계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공공재였다.
표준을 가진 국가의 공통된 메리트는 분명하다. 첫째, 시장 진입 장벽을 설계할 수 있다. 둘째, 기술 사용에 대한 지속적 수익을 확보한다. 셋째, 공급망의 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구축한다. 넷째, 산업 위기에도 호환성과 신뢰성을 기반으로 빠르게 회복한다. 표준은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산업 자산이다.
반면 한국 패스너 산업은 전쟁 이후 외국 규격 의존 구조로 출발했다. 생산량은 증가했지만 독자 표준을 설계하는 전략은 부족했다. 완제품 기업의 하청 구조에 편입되면서 가격 경쟁은 심화됐고 연구개발 투자는 장기적으로 위축됐다. 기초 산업이라는 이유로 정책 우선순위에서도 밀려났다.
그러나 미래 산업은 다른 조건을 요구한다. 피지컬 AI와 로봇, 미래 모빌리티와 우주 산업은 모두 고정밀 반복 체결과 구조 신뢰성을 전제로 한다. 초경량 설계와 분해 가능 구조는 탄소 중립 시대의 핵심 요건이다. 접착과 용접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제조 체계를 완성할 수 없다. 체결 기술의 정밀성과 표준화가 다시 산업 경쟁력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이제 정부도 정책적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첫째, 국가 차원의 차세대 체결 기술 표준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 둘째, 국제 표준 기구 참여를 확대해 국내 기술을 글로벌 규격으로 연결해야 한다. 셋째, 뿌리 산업 전문 인력 양성과 장기 연구개발 펀드를 조성해야 한다. 넷째, 완제품 대기업과 기초 부품 기업이 공동으로 표준을 설계하는 협력 모델을 제도화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제품을 잘 만드는 나라였다. 이제는 산업의 기준을 만드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패스너는 작은 부품이지만 산업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다. 표준을 선점하면 시장 질서를 설계할 수 있고, 표준을 잃으면 타인의 질서에 편입된다.
보이지 않는 표준을 가진 국가만이 미래 제조를 지배한다. K 패스너 전략은 단순한 부품 산업 육성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산업의 참여자가 아니라 설계자가 되기 위한 출발선이다. 지금이 그 전환의 적기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게임·CG·모델링 분야에서 활동하며 ㈜드래곤플라이의 ‘퀘이크워즈 온라인’ 그래픽 총괄
·드림투스튜디오 설립해 극장용 창작 애니메이션과 증강현실 콘텐츠를 기획·제작
·웹툰과 3D 그래픽 교육학원인 아트원애니센터의 원장 역임
·(현) ㈜볼츠원 대표
*소개: 조형 감각과 공학적 설계를 결합한 K-패스너의 혁신 기술 개발에 집중해 기존 패스너 산업의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체결 기술 표준 확립에 도전하고 있다.
서경IN sk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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