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 패배, 우크라이나 전쟁이 드러낸 미국·유럽의 균열
국민국가 약화·군수 한계·에너지 딜레마 등 문명적 진단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냉전 이후 국제 질서에 가장 큰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에마뉘엘 토드는 이 전쟁의 본질을 다르게 본다. 러시아의 공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 과정에서 드러난 '서방 내부의 취약성'이라는 것이다.
신간 '서방의 패배'(아카넷)에서 토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노출된 미국과 유럽의 구조적 문제를 분석한다. 전쟁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라, 서방 문명이 안고 있던 균열을 외부로 드러낸 사건이라는 진단이다.
△ "국민국가의 해체"가 불러온 비대칭
저자가 지목한 위기의 핵심은 국민국가의 토대 약화다. 러시아를 비롯한 비서방 국가들은 여전히 '주권과 생존'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국민국가 논리 속에서 움직인다. 반면 서방 사회는 중산층의 붕괴, 엘리트와 대중의 분리, 공통의 문화적 기반 약화로 사회적 응집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토드는 이러한 차이가 전쟁 대응에서 비대칭을 낳았다고 본다. 상대는 국가의 존속을 전제로 전략을 세우지만, 서방은 동일한 결속력을 전제하지 못한 채 대응한다는 주장이다.
△종교적 기반 약화와 공동체성의 붕괴
저자는 서방 사회를 지탱해온 기독교적 윤리의 쇠퇴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다. 종교는 단순한 신앙 체계를 넘어 노동 윤리, 도덕 개념, 공동체 의식을 형성해온 기반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공동체를 위한 희생 능력과 국민 감정의 약화는 종교적 기반의 공백과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한다. 이는 장기적 갈등 상황에서 사회적 결속을 유지하는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진단이다.
△미국의 군수 한계와 '전략적 부담'
책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미국의 '전략적 패배' 가능성으로 규정한다. 탈산업화 이후 재산업화에 고심하는 미국이 전쟁 지원에 지속적으로 자원을 투입하는 구조적 부담을 떠안았다는 것이다.
특히 군수 산업의 생산 역량이 과거와 달리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 드러났다고 본다. 포탄과 무기 공급의 한계는 세계 최강대국의 물적 기반이 예전 같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제시된다.
△ 유럽의 에너지 딜레마
유럽의 대러 제재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저자는 에너지 의존 구조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단행된 제재가 자충수가 됐다고 평가한다. 값싼 러시아산 에너지 공급이 끊기면서 산업 경쟁력과 물가 안정이 동시에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전쟁은 외부의 적을 상대하는 과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유럽 내부의 취약한 경제 구조와 정책 판단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분석이다.
△전쟁을 넘어 문명 진단으로
360쪽 분량의 이 책은 단순한 전쟁 해설서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울 삼아 서방 사회의 인구 구조, 경제 체질, 사회적 응집력, 가치 체계까지 종합적으로 진단한다.
토드의 분석은 논쟁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이 단순한 군사 충돌을 넘어 국제 질서와 문명적 기반을 되묻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서방의 패배'는 그 질문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문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