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에 먹는 떡국 옛 모습은 칼국수였을까

김세호 경상국립대 한문학과 교수 2026. 2. 1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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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호의 한문학브런치
새해 떡국 문헌 속 기록
바야흐로 2026년 병오년 새해가 도래했다. 굳이 십간에 색깔을 더해 '붉은 말의 해'라고들 한다. 적토마를 떠올리며 힘찬 도약을 기약하고 새해 운세를 풀이하며 희망을 점쳐본다. 나름 저마다 방법으로 새해를 맞이하지만 설날 떡국 한 그릇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오늘날 차례를 지내지 않아도 떡국 한 그릇은 그냥 건너뛰기 어렵다. 과거 한문에서는 떡국을 탕병(湯餠)‧병탕(餠湯) 등으로 기록했다. 이러한 떡국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진정한 새해를 맞아 떡국 한 그릇으로 새해를 기념한다.
떡국. /한국교육방송공사(EBS)

◇17세기 새해의 아침 풍경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떡국을 먹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시작과 관련하여 여러 논쟁이 있거니와, 이미 조선 후기 무렵 이러한 풍속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민구(李敏求, 1589∼1670)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歲陽遍窮蔀, 새해 양기 궁벽한 집에 두루 미치고

朝曦射高棟. 아침 햇살 높은 마룻대에 내리 쬐네

湯餠催我起, 떡국 먹으라며 일어나기를 재촉하니

笑樂從人哄. 즐겁게 웃으며 사람들 떠들썩하구나.

이민구, <동주시집(東州詩集)>권6, '임오년 새해(壬午元日)'.

1642년(인조 20) 이민구가 새해를 맞아 지은 장편시의 일부이다. 본래 앞뒤로 내용을 이어가며 신년의 의미를 여럿 담아냈지만, 이 글에서는 아침부터 가족들이 모여 함께 떡국을 먹는 부분에 주목했다. 이민구는 설날 아침 집에서 탕병을 끓여놓고 일어나라 재촉한 현실을 고백했다. 이미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소란스럽게 아침을 맞은 모양이다. 그 풍속의 기원을 알기 어렵지만 적어도 17세기 무렵 새해 아침 떡국을 먹는 풍속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떡국의 재료로 쓰는 가래떡.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정약용이 고증한 떡국의 유래

그렇다면, 당시 먹은 떡국은 오늘날 먹는 떡국과 유사할까. 굳이 탕병이란 글자에 천착해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는지 모른다. 다음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기록이다.

탕병은 국수를 삶은 음식이다. 지금 사람들이 새해에 먹는 흰 떡국을 푹 끓여 먹는 것으로 대신하나 잘못이다. 중국 사람들은 탕병을 일러 불탁(不托)이라 하고 또는 박탁(䬪飥)이라 하니 바로 습면(濕麪)이다. <당서(唐書)> '명황후전(明皇后傳)'에 이르기를, "아충(阿忠)은 옷을 벗어 한 말의 국수와 바꾸어 생일 탕병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청성잡기(靑城雜記)>에 이르기를, 무슨 국수로 삶은 것을 모두 일러 탕병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정약용, <아언각비(雅言覺非)> 권3, '탕병'.

정약용이 <아언각비>에서 탕병을 고증한 내용 일부이다. 당시 사람들이 새해 떡국을 탕병이라 하는 현실을 두고 오류임을 역설했다. 중국 사람들이 탕병을 '불탁' 또는 '박탁'이라 한다고 하니, 이는 우리나라에서 먹는 수제비나 칼국수와 유사한 음식을 말한 것 같다. 이에 중국의 <당서>를 인용해 생일에 만들어 먹는 음식이라 했고, 아울러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를 들어 본래 국수의 일종임을 고증했다. 생일을 기념해 먹던 국수 따위가 떡국으로 와전되며 모두 탕병으로 혼용한 결과란 말이다. 어쩌면 처음 떡국은 지금과 다른 형태에서 시작한 것인지 모른다.

◇이덕무가 명명한 첨세병

오늘날 떡국의 이칭으로 첨세병(添歲餠)을 지칭한 경우가 보인다. 글자 그대로 '나이를 먹는 떡'이란 말이니, 18세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명명한 데에서 유래한다. 이덕무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千杵萬椎雪色團, 천 번 찧고 만 번 때려 눈빛처럼 둥그니

也能仙竈比金丹. 신선 부엌에 있는 금단과 견줄 만하겠네.

偏憎歲歲添新齒, 해마다 새로 나이 먹는 일 유독 싫기에

怊悵吾今不欲餐. 슬퍼하며 나는 이제 먹지 않고자 하노라.

이덕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1, '첨세병'.

이덕무가 첨세병을 읊은 시의 전문이다. 앞에 서문을 부기해 떡국의 의미를 설명하고 시를 지었다. 이덕무는 서문에서 새해 흰떡으로 떡국을 만드는 것은 그 맑고 깨끗함을 취해 한 해 동안 건강함을 기원한 의미라고 하였다. 아울러 시를 통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만든 흰떡이 신선의 장생불사를 위한 금단과 같음을 예찬한 모습이 보인다. 다만, 문제가 있으니 금단은 영원한 삶을 보장하지만 떡국은 되레 한 살을 더 먹고 죽음을 향해 간다. 이에 이덕무는 떡국을 먹지 않겠노라며 늙고 싶지 않은 마음을 고백했다.
떡국.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조선 후기 사정이 어려워도 모두가 떡국은 챙겨 먹은 것으로 보이지만 불가피한 여건으로 이를 이행하지 못한 사례도 있다. 서경순(徐慶淳, 1803∼?)이 그러하다.

내(서경순)가 한 주부(韓主簿)에게 말했다. "올해는 다행히 나이를 먹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새해에 떡국을 먹지 않았습니다." 한 주부가 말했다. "비록 나이는 드시지 않았지만 다시 늘어나는 백발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내가 손으로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한참을 슬퍼하다 말했다. "동파(東坡: 소식(蘇軾))가 백발을 좋아한 것은 근심 걱정을 견디지 못해 나온 것이니 그리하여 '어쩔 수가 없다(無可奈何)'라는 말을 지었나 봅니다." (서경순,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1856년 1월 1일'.

서경순은 1855년(철종 6) 연행사(燕行使)의 종사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다. 이듬해 귀국하는 길에 중국에서 새해를 맞았고 이상은 주부 한응태(韓應泰)와 나눈 이야기 일부이다. 서경순 등은 타지에서 새해를 맞느라 떡국을 먹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나이를 먹지 않았다며 농을 건네 위안을 삼으려 했고 한응태는 떡국과 무관하게 흰머리가 늘어가는 현실을 지적했다. 서경순은 소식(蘇軾)이 완계사(浣溪沙에서 옛일을 회상하며 읊은 시를 들어 인간사 어쩔 수 없음을 탄식했다.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 없지만 늙지 않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은 법이다.

◇떡국 한 그릇에 담긴 온정

어린 시절 떡국은 나이를 먹는 중요한 의식으로 여겨진 것 같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며 몇 그릇을 비우는 아이들도 있다. 이러한 떡국의 풍속은 19세기 편찬된 여러 <세시기(歲時記)>에 자세하다. 홍석모(洪錫謨)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가래떡을 만들고 잘게 썰어 장국에 끓이니 새해 제사에 올리고 손님들 접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세찬(歲饌)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새해의 기쁨을 나누는 대표적인 명절 음식이라 할 만하니 굳이 나이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이제 구정을 보내면서 본격적인 새해가 시작되었다. 떡국 한 그릇처럼 우리 모두에게 따뜻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김세호 경상국립대 한문학과 교수

☞필자 소개 : 한문을 조금 읽을 줄 아는 21세기 현대인입니다. 옛사람을 좋아하며 고서를 뒤적입니다. 고전이 제일 재미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