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욕 눈먼 맥아더... '밀애 스캔들' 무마해 준 아이젠하워에 뒤통수까지
더글러스 맥아더 上: 12면체 인간의 초상④(끝)
편집자주
6.25 기획 ‘명장’이 다루는 마지막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맥아더는 할 말이 참 많은 인물입니다. 관련 기록도 방대하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맥아더만큼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3개월에 걸쳐 세 번(상·중·하)으로 나눠 최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2월 출고되는 첫 파트(상편)는 한국전쟁에 관여하기 전까지의 맥아더를 탐구하는 ‘맥아더 개론’입니다. 인간 맥아더를 설명할 수 있는 12가지 특징을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글은 마지막 네 번째입니다.
※ '12면체 인간의 초상 3'에서 이어집니다.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4490000739)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5490003090)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6390001288)

“내가 대통령이 되려는 이유는 단 하나야. 그놈의 자식 루스벨트를 이기기 위해서라네.”
(맥아더가 휘하 장군 아이첼버거에게 했던 말)
제10면 정치군인: 대선 추대받은 현역 장군
여기서 제시하는 맥아더의 12면체 특성 중 가장 신랄한 비판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그의 정치적 행보다. 민주주의 선진국들은 선출 지도자(민간인)가 장군을 지휘하며 군의 통수권을 독점하는 문민통제(문민우위) 원칙을 일찌감치 정립했다. 군이 정치에 개입하거나 군인이 정치적 판단을 할 기회를 아예 제공하지 않고, 장교단을 정치적으로 중립인 전문가 집단으로만 활용하는 전통이다. 정치지도자와 군사지도자 권한에 큰 차등을 둔 것은 ‘각자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차이 나기 때문이다. 장군은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지면 되지만, 정치지도자는 자신에게 표를 준 국민 전체를 향해 무한대의 책임을 진다.
특히 왕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공화정 체제로 건국한 미국의 경우, 독립 과정에서 영국군과 대립한 경험 때문에 상비군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이 컸다. 대륙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이 군권을 쥐면서도 토론을 통해 민간을 설득하는 등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문민통제 원칙은 역사적으로도 굳어졌다. 다만 250년 미국 역사에 실병력 통제권을 쥔 장군이 대통령 명령에 항명하거나 항명에 가깝게 저항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는데, 미국 언론에 언급되는 두 가지 주요 사례가 바로 △남북전쟁 당시의 조지 매클렐런(vs 에이브러햄 링컨)과 △한국전쟁의 맥아더(vs 트루먼)다.
두 사람 모두 오만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나중에 직접 대선에 출마까지 했던 ‘정치군인’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매클렐런의 사례가 링컨의 공세 명령을 거부한 ‘소극적 반항’이었다면, 맥아더는 워싱턴 지침을 어기고 공격을 감행하거나 언론을 통해 대통령 외교정책을 명시적으로 비판했던 ‘적극적 항명’이었다. 또 매클렐런은 ‘노예를 해방해 나라를 어지럽힌 군사 문외한 링컨’ 개인에게 저항한 것에 가까웠지만, 맥아더의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자아는 유럽 우선 외교정책을 상정했던 행정부와 의회 시스템을 부정하려고 했다. 결국 매클렐런의 저항은 링컨을 향한 것이었고, 맥아더의 항명은 워싱턴 전체를 향한 것이었다. 맥아더의 불충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심각하고 무책임했던 것이다.
맥아더는 군인으로서 훌륭한 자질도 많이 갖췄지만, 민주주의 국가 군사지휘관으로서 필수적으로 지녀야 할 ‘선출 권력에 대한 복종심’은 현저하게 결여된 상태였다. 대규모 부대를 호령하고 화려한 전공을 자랑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더 능력이 떨어지는 민간인’의 말을 따라야 하는 일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후버, 루스벨트, 트루먼 등 세 명의 대통령을 모시면서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항명을 저질렀다.

“전쟁은 군인에게 일임하기엔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다.”
(문민통제를 강조한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그의 거대한 자아는 최고위 장군(general in chief)에 만족할 수 없었다. 군통수권자(commander in chief)가 되어야만 치유될 수 있었던 결핍이었다. 그래서 결국 직접 대통령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맥아더는 현역 육군 대장(당시 미군 최고 계급) 신분이던 1944년 미 대선 공화당 예비선거에 ‘사실상’ 출마했다. 자신이 직접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지지자가 공화당 일각에서 자기 이름을 투표 용지에 올리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4월 공화당의 위스콘신 예비선거에서 실제 득표를 했고 일리노이 예비선거에선 1위를 기록했다. 그 스스로 정치인 활동을 한 적은 없었지만, 자기 후원자인 아서 반덴버그(미시간) 상원의원이 운영하는 캠프에 참모들을 보내 선거운동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정황이 있다. 1943년 한 해에만 맥아더 대선 출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참모장 서덜랜드(봄)와 정보참모 윌로비(여름)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보수 언론인들을 자기 대선 출마에 필요한 ‘바람잡이’로 활용하려 했던 증거도 있다. 맥아더는 유명 라디오 진행자 겸 작가인 프레이저 헌트에게 ‘대선 출마용 전기’를 준비하도록 했는데, 이를 위해 헌트는 전쟁 기간 동안 맥아더사령부를 자유롭게 취재하는 특권을 가졌다. 나중에 이 전기(실제 출판되지는 않음)를 맥아더가 직접 수정한 사실도 있다.
맥아더의 대통령 욕심은 68세 때인 1948년 대선에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는 도쿄사령부에서 일본을 통치하고 있으면서 본국 정치무대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 맥아더 입장에서 1948년 대선은 4년 전 선거보다 더 가능성이 있었다. ‘전시 출마’에 따른 부담을 덜 수 있었고 상대는 ‘거물’ 루스벨트가 아니라 ‘어쩌다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은’ 풋내기 트루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의 항복을 직접 받은 맥아더는 4년 전보다 훨씬 유명해져 있었다. 1945년 갤럽이 미국인들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인가’를 물은 설문조사에서, 맥아더는 루스벨트-링컨-예수-워싱턴에 이어 5위에 올랐다. 1946년 설문에선 ‘생존 미국인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혔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직접 정치에 발을 담그는 대신 부하를 ‘메신저’로 이용했다. 당시 일본 주둔 8군사령관으로서 맥아더 대신 워싱턴을 방문했던 아이첼버거의 일기를 보면, 맥아더는 당시 미국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던 전쟁영웅 아이젠하워와의 연합전선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젠하워가 이번 선거에서 자신을 밀어주면, 1952년엔 자신이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아이젠하워를 밀어준다는 거래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워싱턴에 한 번 가지도 않고 사과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기다린 맥아더의 고고한 선거전략은 끝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지지자들은 그가 직접 미국으로 와서 유권자들에게 얼굴을 보여주길 바랐지만, 맥아더는 계속 일본에만 머물렀다. 결국 텃밭인 위스콘신의 예비선거에서도 승리하지 못했고, 네브래스카에선 5위를 기록했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후보에서 빼줄 것을 요청했으나, 일부 지지자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 맥아더는 1차 투표에서 8표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공화당 최종 후보는 434표를 얻은 토머스 듀이로 확정됐다.

“나 아스피린 하나 더 먹어야겠네. 내 인생에 나한테 이런 식으로 얘기한 사람은 맥아더가 처음이야.”
(1944년 7월 하와이에서 맥아더에게 보고 받은 루스벨트의 말)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던 맥아더는 대통령들을 상관으로 존중하기는커녕 오히려 현직 대통령을 자신의 경쟁자로 삼거나 군통수권자와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을 하며 워싱턴의 반감을 샀다. 2차대전 중엔 루스벨트의 권위를 여러 차례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4년 7월 루스벨트가 태평양 전선 주요 지휘관들을 하와이에 소집했을 때, 맥아더는 먼저 와서 대통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 있는 이벤트를 통해 군중의 관심을 유도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루스벨트의 연설문비서관 새뮤얼 로즌먼은 “굉장한 자동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끽 소리를 내며 멈추는 오토바이 호위와 함께, 내가 이제껏 본 가장 긴 컨버터블 차량(오픈카)이 부두에 나타났다”며 “그 뒷자리에 앉은 맥아더가 훌쩍 내리더니 배다리를 단숨에 건넜다”고 회상했다. 자신을 루스벨트의 회담 카운터파트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도착 장면을 왁자지껄하게 연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영소 3국 정상이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얄타회담(1945년 2월 4~11일)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맥아더가 루스벨트 쪽으로 쏠린 여론의 관심을 돌리려고 적극적인 언론 플레이를 했다는 의혹도 있다. 당시 맥아더는 겨우 루손섬(필리핀 최대 섬)에 상륙해 수도 마닐라 방면에서 전투를 시작했을 뿐이었지만, 이 상황을 과장해 “적군의 괴멸이 임박했다”고 공표했다. 맥아더의 한 참모는 나중에 “연합국 지도자들이 모인 동안 자기 이름을 드높이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돌이켰다. 그러나 실제로 마닐라 전투는 3월 초까지 한 달 이상 이어졌고, 루손 지역에선 일본이 패망하는 8월까지 전투가 계속됐다.

대통령을 무시하는 이런 특성은 루스벨트 후임 트루먼 집권기에도 바뀌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직후 펜타곤은 한반도 후속 대책 논의를 위해 맥아더에게 본국에 일시적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지만, 맥아더는 이를 계속 거부했다. 결국 대통령 트루먼이 몇 차례나 중간 기착지를 거쳐 필리핀과 하와이 사이 외딴 섬 웨이크섬까지 이동해야 했다. 당시 군 통수권자를 만난 맥아더는 거수경례 대신 악수로 인사를 대신했다. 당시 웨이크섬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모습은 절대 상하관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회담을 하는 두 나라 대통령처럼 동등한 관계처럼 보였다.

“마닐라에서 근무하던 1930년 4월, 맥아더는 이사벨 로사리오 쿠퍼에게 푹 빠졌다. 당시 50세 맥아더는 16세 애인을 ‘우리 아가’라고 불렀다.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자 이사벨을 데려와 워싱턴 가까운 지역에 정착시켰다.”
(리처드 프랭크의 '맥아더' 중에서)
⑪내로남불: 난 되지만 넌 안 돼
맥아더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또 다른 특성은 바로 남에게 엄격하며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한 ‘내로남불’ 태도다. 남에 대한 비난을 삼가지 않았던 맥아더는 자기가 비판받는 상황을 결코 참지 못했다. 그는 자기 공적을 알리거나 대통령 외교 정책을 깎아내리기 위해 언론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면서도, 언론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소송까지 불사하며 강력하게 대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육군참모총장 시절 드루 피어슨과 로버트 앨런 등 두 언론인과 벌인 명예훼손 소송이다. 1934년 두 기자는 칼럼을 통해 맥아더의 독재자 성향을 비판했는데, 맥아더는 이들을 상대로 “175만 달러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소송을 제기했다. 지금으로 치면 4,200만 달러(약 6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배상 요구인데, 실제 이 돈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단 두 기자와 다른 기자들의 추가 비판을 막기 위한 ‘재갈 물리기’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맥아더는 자신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날 위기에 몰리자, 곧바로 소송을 취하해 버렸다. 피어슨이 맥아더의 전처와 맥아더의 정적을 취재한 결과, 맥아더가 필리핀 근무 시절부터 사귀던 34세 연하 여성을 워싱턴으로 데려와 집을 얻어주며 밀애 관계를 지속해 왔던 것이 밝혀졌다. 당시 맥아더는 이혼 후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자면 불륜은 아니었지만, 이 밀월 관계에 공직을 이용한 정황이 있고 어린 애인과의 대화에서 루스벨트의 장애를 언급하며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맥아더가 매우 곤경에 몰릴 수 있었던 스캔들이었다.
이 여성은 당시 16세(21세였다는 설도 있다)인 이사벨 로사리오 쿠퍼. 어릴 때부터 배우로 일했던 쿠퍼는 12세 때 필리핀 영화 역사상 최고의 키스 장면을 소화한 이력이 있었다. 1930년 이혼한 지 1년 정도 지난 상태였던 맥아더는 마닐라에서 어린 배우 이사벨을 만났고, 미국으로 발령(참모총장)을 받자 이사벨을 데리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피어슨이 맥아더와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이사벨을 증인으로 부르려는 시도를 하자, 황급히 놀란 맥아더는 기자들과의 소송비용 일체를 부담하고 이사벨에게 거액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소송을 취하했다. 이사벨은 맥아더와 헤어진 후 할리우드로 가서 배우가 됐다.

맥아더는 자기 부관(소령) 한 사람에게 기자들과의 소송전, 이사벨의 폭로 대응 등 사적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이사벨이 자기 치부를 공개할 것이란 소식을 듣자, 맥아더는 부관을 보내 워싱턴 곳곳을 수색해 이사벨의 행방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나중엔 이 부하를 시켜 이사벨 측에 1만5,000달러의 합의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상관의 젊은 애인을 찾아 워싱턴 거리를 헤매고 돈으로 상관의 사고를 입막음했던 이 불쌍한 소령은 누구였을까. 바로 연합군총사령관과 미국 재선 대통령까지 오르게 되는 아이젠하워다.
맥아더는 나중에 이 고마운 부하에게 당시 뒤치다꺼리를 보답하긴커녕, 아이젠하워의 사생활을 꼬투리잡아 충성스럽던 부하의 정치 경력에 큰 상처를 내려고 했다. 1948년 대선 당시 아이젠하워가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자,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와의 연합전선을 구축(정부통령 후보)하는 동시 아이젠하워가 2차대전 때 비서(케이 서버스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워싱턴 내 아이젠하워의 친구들은 ‘그렇게 되면 이사벨과의 스캔들을 폭로할 것’이라며 역공을 불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도쿄사령부 당시 맥아더의 사자로 워싱턴에 갔던 아이첼버거의 일기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맥아더가 남긴 또 하나의 중대한 오점은 바로 돈 문제였다. 1942년 1월 미군이 일본군 기습을 받고 바탄반도를 힘겹게 지켜내고 있을 때, 필리핀 대통령 케손으로부터 비밀리에 50만 달러(지금 가치로 987만 달러)의 거액을 받은 것이다. 이 돈은 케손이 미국 은행에 예치 중이던 과도정부 자금 64만 달러를 꺼내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에게 준 것이다. 참모장 서덜랜드(7만5,000달러), 부참모장 리처드 마셜(4만5,000달러), 전속부관 시드니 허프(2만 5,000달러) 등 맥아더를 추종하던 ‘바탄 갱’들도 거액을 수령했다.
명목상으로 이 돈은 필리핀 정부가 군사고문으로 일했던 맥아더에게 주는 ‘특별급여’였지만, 하필 일본 침공으로 패망 위기에 몰린 필리핀 정부가 그 위급한 상황에서 왜 맥아더 예전 급여를 챙겨줘야 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케손 입장에선 미국의 군사 지원이 시급했고, 맥아더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리 급하게 돈을 줬을 것이다. 한가하게 옛날 일(군사고문 시절)이나 챙길 때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현안(일본 침공)과 관련한 뇌물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의심된다. 액수도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1년 급여가 7만5,000달러였으니, 맥아더가 받은 50만 달러는 거의 대통령의 7년치 연봉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케손을 필리핀 밖으로 탈출시켜 주는 대가로 받은 돈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당시는 미군과 필리핀군 연합부대가 바탄반도에서 목숨을 걸고 필사적 방어작전을 하고 있을 때다. 그런 상황에서 바탄 남쪽 코레히도르섬 요새에서 머물던 총사령관이 주둔국 정부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받았다는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떠나 매우 파렴치한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다. 오랜 기간 필리핀 정부에게 도움을 줬던 아이젠하워의 상반된 행동을 봐도 이 돈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나중에 케손은 워싱턴에서 만난 아이젠하워에게도 특별급여 명목으로 돈을 주려고 했지만, 아이젠하워는 “감사장만 써 주시면 그걸로 족하다”면서 돈을 거절했다. 진짜로 순전한 급여 성격이었다면 아이젠하워가 받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 수상한 돈 거래는 당대에는 미국 정부 내 소수 인사만 알고 있던 비밀이었지만, 맥아더 사후인 1979년 캐럴 페틸로 보스턴대 교수가 미국 정부 측 송금 확인 자료를 찾아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외국 정부로부터 받은 온갖 훈장과 포상을 전부 자기 자서전에 기록했던 맥아더는 필리핀 정부로부터 받은 ‘특별급여’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맥아더는 (자신의 라이벌) 마셜이 가라앉기만 한다면 국가라는 배가 침몰하는 것을 보고도 좋아할 인간이다.”
(맥아더 부하 아이첼버서의 일기 중에서)
⑫선사후공: 언제나 내 일이 먼저
마지막으로 살펴볼 맥아더의 특성은 선사후공(先私後公)이다. 그는 결정적 순간에 군의 이해나 국가의 이익보다 자신의 명예·인연·체면을 앞세웠다. 이 특징은 그가 필리핀을 보는 관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맥아더는 아버지가 총독을 지내고 자신도 군사고문(원수)를 역임한 필리핀을 ‘개인 영지’ 정도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정부가 볼 때 필리핀은 일본의 태평양 팽창을 막을 교두보 성격의 지정학적 요충지였지만, 맥아더 입장에선 그저 ‘내 세력권’이니 지켜야 한다는 당위적 인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정부로부터 뇌물 성격의 자금 50만 달러를 받으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을 보면 맥아더가 필리핀 문제에서 자각하고 있던 특별한 우월감을 짐작할 수 있다.
필리핀을 향한 맥아더의 개인적 집착은 ‘어떤 경로를 거쳐 일본 본토를 공략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미 해군은 굳이 필리핀에 상륙해 치열한 지상전을 치를 필요 없이 태평양 주요 섬만 차례차례 점령해 일본 본토를 폭격 사정권에 둔 다음, 일본 열도를 곧바로 공략하자는 접근법을 주장했다. 미군이 전쟁 중반 이후 일본군에 비해 확실한 제해·제공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요 항구와 비행장만 점령하는 식으로도 전쟁이 가능했기 때문에 나온 전략이다. 팔라우(필리핀 민다나오섬 동쪽)와 마리아나제도(괌·사이판 등)만 차지하면 필리핀 없이도 일본을 사정권에 둘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굳이 뉴기니섬과 필리핀 제도를 거쳐 일본으로 올라가는 길을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필리핀을 우회한다면, 미군 포로와 충성스러운 필리핀인들을 적의 수중에 내버려둔다면, 더없이 엄중한 심리적 반발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니미츠와 다른 전략가들이 ‘어떻게 하면 가장 희생을 줄이면서 단기간 내에 전쟁을 끝낼 것인가’를 놓고 철저히 군사적 고민을 했다면, 맥아더는 미국의 위신과 자신의 체면을 고려한 정치적 접근을 했던 것이다. 맥아더가 주장한 필리핀 탈환전을 두고 다른 군사전략가들은 “도쿄로 가는 가장 느린 길”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육군 소속의 마셜(참모총장)마저 필리핀 루트에 회의적이었다.
맥아더가 필리핀 탈환전을 미국의 전쟁 전략이 아니라 ‘개인적 과업’ 차원에서 인식했다는 단서는 또 있다. 그는 1942년 필리핀을 탈출해 호주 애들레이드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을 만나 “나는 돌아갈 것입니다(I shall return)”라고 강조했는데, 이 발언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 연설에 이어 맥아더가 남긴 말 중 두 번째로 유명한 말로 꼽힌다. 그 당시 맥아더의 메시지를 사전에 파악한 미 전쟁정보국(OWI·전시 선전 및 검열 담당 기관)에서 ‘나(I)’를 ‘우리(We)’로 바꿔달라는 부탁했지만, 맥아더는 끝내 거부하고 필리핀 탈환은 ‘나의 일’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맥아더는 끝내 필리핀 탈환전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루스벨트는 1944년 7월 육군과 해군 주요 사령관들을 하와이에 모은 뒤 양쪽 의견을 다 반영하는 쪽으로 어정쩡한 합의를 이끌었다. 그래서 미군은 전체 병력을 니미츠 사령부와 맥아더 사령부 둘로 나누어 양쪽으로 도쿄를 향해 밀고 올라가야만 했다.

“개인 감정, 필리핀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전쟁 조기 종결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표를 훼손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조지 마셜 당시 육군참모총장)
맥아더의 필리핀 집착은 1945년 3월 마닐라를 수복하고서도 계속됐다. 해군과 힘을 합쳐 일본 본토 공략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었지만, 맥아더는 돌연 ‘필리핀 제도의 완전 회복’을 전략 목표로 제시하며 병력을 남쪽으로 돌려 다른 섬 장악 작전을 시작했다. 이때 맥아더는 거짓 보고로 합참을 속였다는 의혹을 받는데, 합참에는 “필리핀군이 미수복 지역을 되찾을 것”이라고 보고한 다음 정작 필리핀 7개 섬 수복 작전에 미군을 동원했다. 맥아더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전기를 쓴 클레이턴 제임스는 “맥아더는 그저 개인적으로 필리핀의 해방자가 되고자 했을 뿐”이라고 이 군사작전을 평가했다. 합참은 맥아더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승장을 해임할 수는 없어 하는 수 없이 맥아더 작전을 사후 승인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워싱턴이 왜 이렇게까지 일선 장군의 허위보고와 항명을 그대로 참고만 있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현장 사령관이 대통령과 합참을 농락한 사실이 확인됐을 때 곧바로 해임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더라면, 5년 후 6·25 전쟁에서 맥아더의 독단과 오만으로 인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럽(대독 전쟁)과 태평양(대일 전쟁) 양쪽에서 국력을 갈아넣어 그야말로 총력전을 펼치고 있던 미국 정부(민주당 루스벨트) 입장에선, 공화당과 보수 진영의 지원을 등에 업은 맥아더를 해임해 국론 분열로 이어지는 상황만은 피하려고 했다. 맥아더도 루스벨트가 자신을 쉽게 자르지 못할 것이란 점을 알고서 항명과 복종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이어 나갔다.
맥아더가 계속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익을 공익처럼 보이게 하는’ 그의 특출한 포장 능력 덕분이다. 맥아더는 자신의 욕망을 ‘미국의 이익’이나 ‘미국의 자부심’ 등 그럴듯한 외피로 숨기는 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자신의 개인적 열망이 투영된 필리핀 탈환전을 앞두고는 “우리에겐 (1941년 일본군에게 습격을 당한) 빚을 갚아야 할 국가적인 책임이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1941년 3월 필리핀 군사고문보다 한 단계 높은 고등판무관(과거의 총독 지위)이 되려는 마음에서 루스벨트 측근에게 스스로를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맥아더는 자신이 증오하는 루스벨트를 치켜세우며 “필리핀과 아시아 문제에 정통한 저의 자산을 대통령께서 활용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자신의 자리 욕심을 정권에 필요한 자질로 절묘하게 치환한 것이다.

에필로그
지금까지 나열했던 맥아더의 열 두 가지 특징을 잘 기억해 두자. 앞으로 두 편에 걸쳐 서술할 맥아더의 한국전쟁 행보(1950년 6월~1951년 4월)에는, 우리가 12면체 탐구를 통해 파악한 이 특징들이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방식으로 맥아더의 사고행동에 반영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희대의 전쟁영웅이 그렇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는지, 누가 봐도 질 게 뻔했던 대통령과의 싸움을 왜 계속 이어나가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화에선 맥아더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다룬다. 성공의 절정이었으나 몰락의 시작이었던 사건. 역사상 최고로 모험적이었고, 가장 독단적이었으며,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썼으나, 손꼽히게 성공적이었던 상륙작전. 바로 1950년 9월 인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연재는 '인천, 맥아더 인생의 정점’으로 이어집니다. 3월 초 출고 예정입니다.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맥아더 자서전>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맥아더 전기>
-러처드 프랭크 ‘맥아더’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윌리엄 맨체스터 ‘맥아더 1·2’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Carol Petillo ‘Douglas MacArthur, the Philippine years’
-Clayton James ‘The Years of MacArthur’
-H.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Mark Perry ‘The Most Dangerous Man In America’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맥아더를 언급한 다른 인물들의 전기·자서전>
-매슈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Dwight Eisenhower ‘At ease: stories I tell to friends’
<한국전쟁 관련 서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③’
-남시욱 ‘6·25 전쟁과 미국’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f the Korean War’
-Max Hastings ‘The Korean War’
-Richard Rovere and Arthur Schlesinger ‘The MacArthur Controversy and American Foreign Policy’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기사, 기고문, 게시물>
-Hampton Sides ‘Douglas MacArthur Is One of America’s Most Famous Generals. He’s Also the Most Overrated’
-New York Times ‘Data Show MacArthur Got $500,000 Gift From Filipino Leader in 1942; Executive Order Signed by Quezon Complaint Recorded by Ickes’
-PBS ‘The Secret Payment’
-U.S, National Archives ‘The Beginning of the End: MacArthur in Korea’
-Winston Groom ‘A father's legacy drove WWII general MacArthur's ambition’
<논문>
-김남균 ‘더글러스 맥아더 재평가: 미국의 세기와 맥아더’
-송승종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의 민군관계: 조지 워싱턴의 역할을 중심으로’
-Robert Gilbert ‘Douglas MacArthur: Disordered Narcissist’
<헬리콥터 부모가 미치는 영향>
-Gene Beresin ‘How Helicopter Parents Affect Their Children’
-Laurence van Hanswijck de Jonge ‘Helicopter Parenting: The Consequences’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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