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의 이제는 국가유산 ] [47] 딜쿠샤와 김주사의 태극기

윤주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자연유산위원 2026. 2. 1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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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반이 옥스퍼드대 교수 같아요.” 기쁜 마음이란 뜻을 지닌 집 ‘딜쿠샤’의 안주인 메리 테일러가 ‘김주사(본명 김상언)’를 평한 말이다. 김주사는 미국에서 유학해 영어가 유창했다. 당시 미국 출입국 기록을 보면 ‘김상언, 1869년생, 국적 Corea, 1897년 샌프란시스코 도착’이라고 나온다.

그는 학업을 마치고 주미 한국 공사관에 견습생으로 있다가 귀국했다. 1906년부터 의정부 주사를 시작으로 내각 주사 등을 지낸 터라 ‘김주사’라 불렸다. 관직을 그만둔 뒤에는 앨버트 테일러의 사업을 도우며 테일러 부부의 집인 딜쿠샤를 관리했다.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1897년 한국에 와 독립선언문과 항일운동을 세계에 알린 앨버트와의 인연은 운명과도 같다.

영어에 능통한 김주사는 앨버트의 사업 조력자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와 풍습, 일본 침탈의 부당함을 알린 선도자였다. 김주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독립만이 아니다. 그 독립을 유지하는 힘과 능력을 원한다”며 애국의 의지를 전하고 그와 주변 외국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암울한 시기에 억압받는 우리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독립을 지지해 준 외국인들 곁에는 조선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여파 때문인지 일제에 의해 1942년 테일러 부부가 추방되자 김주사도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는 지게로 실려 나와 집에서 숨을 거뒀다고 전해진다.

김주사의 흔적은 사진과 그림에 남아 있고, 유일한 유품으로 그의 집 안방 천장에서 발견된 태극기가 있다. 김주사의 일상과 죽음까지 품어주던 태극기는 손바느질로 한 땀 한 땀 사뭇 다르게 제작되었다. 메리가 김주사 환갑 기념으로 그려준 초상화에는 관복을 차려입고 형형한 눈빛으로 품위를 지키고자 한 모습이 보인다.

김주사의 태극기는 테일러 가문의 많은 기증 유물과 함께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삼일절을 앞둔 이즈음이면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딜쿠샤를 찾는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된 딜쿠샤에서는 일상에서 지켜낸 독립 염원을 소개하는 작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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