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K제조업은 어떻게 세계 명품의 ‘셰프’가 되었나
해법 설계하는 ‘주방’으로...
‘제조업 오마카세’의 전략이
한국 경제의 또 다른 미래

‘오마카세’. 셰프에게 모든 걸 맡긴다는 뜻을 가진 일본어로, 고급 식당의 대명사쯤 된다. 본질은 셰프가 주도권을 쥐고 그만의 철학과 노하우를 담아내는 장인(匠人) 정신이다. 30년간 반도체 기업 TSMC의 기사만 100만 글자 넘게 썼다는 대만 언론인 린훙위안의 저서 ‘tsmc, 세계 1위의 비밀’에서 ‘오마카세’라는 단어를 보고 무릎을 쳤다. 그가 분석한 TSMC의 초격차 비결은 단순 위탁 생산을 넘는 ‘반도체 오마카세’였다. 고객은 원하는 칩의 성능을 제시하지만 최적의 공정과 회로 구성까지는 잘 모른다. TSMC는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수십 년간 쌓은 제조 데이터를 바탕으로 고객사에 더 나은 설계 해결책과 최적의 생산 방식을 제안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이 TSMC를 ‘공장’이 아닌, 애플과 엔비디아의 ‘외부 R&D 센터’로 규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고객사가 ‘무엇’을 만들고 싶다고 하면 TSMC는 ‘어떻게’ 만들지 해법을 제시한다. 마치 최고급 스시 장인이 고객 취향과 그날의 식재료를 감안해 최고의 코스 요리를 내놓듯 TSMC는 최적의 타이밍과 원가로 최고의 칩을 만들어준다.
놀랍게도 TSMC의 성공 공식은 지금 한국 제조업에게도 역경을 딛고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가 되고 있다. 세상이 K-제조업의 위기를 말할 때 스스로 ‘제조 오마카세’의 셰프로 변신을 해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로레알, 에스티로더 같은 글로벌 명품 뒤에는 K-뷰티 주역인 코스맥스가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고객 주문대로 생산하는 OEM(주문자 생산 방식)을 넘어서 고객이 개념을 제시하면 개발부터 생산까지 책임지는 ODM(제조자개발생산)으로 진화하더니 이젠 브랜드의 정체성·디자인·마케팅까지 총괄하는 OBM(제조자브랜드개발)을 제공한다. 코스맥스가 최근 3년간 OBM 서비스로 탄생시킨 브랜드가 50여 개, 관련 매출 성장은 매년 100% 안팎이다.
이런 흐름은 의류 산업도 마찬가지다. 팬코(Panko)는 생소하지만, 유니클로의 파트너라면 쉽게 알 것이다.
매년 유니클로에 1000만 벌을 포함, 6000만 벌을 생산해 국내외 브랜드에 공급한다. 1984년 의정부의 작은 봉제 공장에서 시작해 88올림픽 이후 중국 칭다오로, 다시 베트남으로 생산 기지를 옮겼다. 팬코의 역사는 1원이라도 아끼기 위한 제조업의 고단한 생존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진짜 경쟁력은 베트남 공장이 아닌 서울 성수동 본사에 숨어있다. 80여 명의 R&D 및 영업팀은 파리 등 세계 패션 중심지의 최신 트렌드를 분석해 새로운 디자인·소재·색상을 고객사에 끊임없이 제안한다. 이 ‘역제안’ 능력이 사양 산업이라 불리는 봉제업에서 최대 두 자릿수 영업이익률까지 만든다. 이들에게 제조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방대한 데이터와 트렌드 분석이 결합된 고부가가치의 ‘지식 산업’에 가깝다. 나이키 본사가 신제품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세계 4곳뿐인 공장 중 2곳으로 알려진 TKG태광과 창신INC, 그리고 코치·DKNY 등 명품 핸드백 브랜드의 기획 파트너인 시몬느도 마찬가지다.
틱톡과 같은 소셜미디어가 매주 트렌드를 바꾸는 초고속 유행 시대에 기업들은 수년씩 걸리는 자체 개발 대신 ‘제조 오마카세’와 협업을 하고 있다. 물론 제조업 오마카세의 미래도 평탄치 않다. 최대 위협은 중국이고, 머잖아 AI(인공지능)에게 밀려날 수 있다. 우리 산업구조를 제조업 너머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옳다. 하지만 철강·조선 등 웬만한 제조 분야에서 모조리 세계 최강급인 우리가 당장 제조업을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다. 사양 산업은 없다. 사양화된 전략만 있을 뿐이다. 단순히 주문서를 받는 ‘공장’이기를 거부하고 해법을 설계하는 ‘주방’으로 변신하는 ‘제조 오마카세’ 전략을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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