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조정을 구해달라’ 밀지… 농민군 ‘보국안민’ 깃발을 들다

경북도민일보 2026. 2. 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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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벨트를 가다
‘포항사람 해월 최시형’ 유적지 답사- 남원①
동학농민군 주둔지 깃대바위
지리산 방아치 전투지
남원대회 열린 요천 전경
남원대회 열린 요천 동학농민혁명기념비
교룡산성입구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방아치 전투지 기념비
교룡산성 동학농민혁명기념비
깃대바위와 표지석
김상조 역사문화답사가

남원은 전북의 동남부에 위치한 고을이다. 북으로 장수, 남으로 전남 곡성, 구례, 서로 임실, 순창, 동으로 경상도 함양, 하동과 접한다. 남원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1824~1864)가 1861년 잠시 머물던 고을이다.

경주관아 지목과 유림의 핍박이 심했기 때문이다. 수운은 1861년 11월 경주를 출발, 남원에 도착한다. 먼저 광한루 앞 서형칠이 운영하는 한약방을 찾는다. 노자로 준비해온 약재를 돈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불 등 가재도구를 마련, 교룡산성 안 은적암에 거처를 마련해준다. 수운은 며칠간 머물던 한약방을 떠나 산성으로 올라간다. 수운은 5개월여 간 이곳에 머문다. 그간 동학 핵심 경전이 되는 '동경대전'과 '논학문' 등을 집필한다. 피신 중 자신의 도가 서학이 아님을 밝히고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그는 1861년 11월부터 다음 해인 3월까지 머문다.

수운의 은거는 동학이 호남에 처음 전파된 계기가 된다. 이 시기 은적암을 찾은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수운이 1862년 봄 경주 용담정으로 되돌아온 후에도 찾아와 가르침을 받는다. 후일 남접 대도주로 1893년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서장옥도 이들 중 한 명이다. 서장옥은 당시 나이어린 승려였으나 수운을 만나 직접 교리를 묻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883년께 승복을 벗고 입도한다. 남원에 동학을 널리 포덕한 인물은 김홍기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88년 장인 최찬국을 통해 입도한다. 전라좌도 포덕을 통해 자신의 순천김씨 일족을 대거 입도시킨다. 친, 인척은 무려 5,000여 명에 이른다. 순천김씨 문중이 남원 동학의 기반이 된 것이다. 그는 후일 대접주로 1894년 9월 2차 봉기를 주도하게 된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는 1894년 5월 8일(양력 6월 11일) 조정과 맺은 전주화약으로 일단락된다. 대접주 김개남은 남원관아를 점령, 전라좌도 도회소를 설치한다. 이는 남원, 임실, 장수, 진산, 금산 등지를 관할하는 집강소다. 그런데 남원부사 이용훈 등이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반대하고 나선다. 이에 김개남은 이용훈을 처단한다. 김개남 부대는 수운이 은거했던 교룡산성에 주둔한다. 백제 시대 쌓은 교룡산성은 해발 518m 교룡산을 에워싼 둘레 3.1km 성곽이다. 밀덕봉과 복덕봉 등 가파른 산세가 가팔라 군사요새로 적합하다.

1894년 6월 21일(양력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다. 그리고 고종을 협박, 친일내각을 수립한다. 이때 동학농민혁명 진압부대 '양호순무영'을 설치한다. 조, 일 연합부대로 일본군이 관군을 지휘하는 체제였다. 히로시마 대본영에서는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에게 동학농민군 대학살(살육)을 지시한다. 조선 침략의 가장 큰 걸림돌을 동학세력으로 판단한 것이다. 양호순무영은 동로, 서로, 중로군 등 세 갈래 토벌 작전에 나선다. 그리고 홍주, 원주, 나주, 상주 등지에 '소모영' 또는 '초토영'을 설치한다.

이때 호남 동학농민군 지휘부에 고종의 밀지가 전해진다. 일본군을 몰아내고 위기에 처한 조정을 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을 명분으로 한양 진격을 서두른다. 그러나 이에 앞선 논의 차 남원에 모두 집결키로 한다. 그리고 '요천' 백사장에서 대규모집회(남원대회)를 갖는다. 일제 침략에 맞서 항일의지를 다지며 동학농민군 체제를 재정비한 것이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7만 여명이었다. 백사장은 한때 군사훈련장이 된다. 이어 전봉준과 손화중은 충청감영 공주, 김개남은 충청병영 청주읍성을 치기로 한다. 이후 한양 진격이 공동의 목표였다.

남원의 동학농민군은 해월 최시형의 9월 총기포령 이후 드넓은 쪽뚤(현 전북 남원시 이백면)에서 기포한다. 지금도 주둔지 기치를 꽂았다는 바위가 남아 있다. 그리고 11월 14일 동쪽 운봉읍 공격에 나선다. 지도자는 대접주 김홍기 등이었다. 이들은 남원 잔류 동학농민군과 함께 싸워야 했다. 김개남 부대가 청주 출발 전 보국안민 기도를 위해 임실 상여암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남원과 운봉일대 동학농민군 세력은 약화된 상태였다. 잔류 동학농민군은 채 800여명이 되지 않았다.

남원과 운봉은 지리산 방아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운봉 일대는 고원지대다. 남원에서 운봉을 가려면 가파른 산길이다. 방아치는 천혜의 요새와 같고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다. 운봉의 민보군은 토호 박봉양이 이끌었다. 부자이고 권세가 막강한 인물이었다. 초기에는 재산 약탈을 두려워해 동학에 입도했다가 곧 단절한다. 남원에서 2차 봉기가 있자 재산을 풀어 친척과 하인들을 모아 민보군을 조직한다. 새로 부임한 운봉현감 이의경도 민보군 지원을 약속한다. 여기에 함양의 포군 150명 등 경상도 관군도 힘을 보탠다. 경상감사 조병호는 총통 300정과 화약 수천 근을 지원한다. 민보군 세력은 5,000여 명을 헤아렸다.

양측은 방아치 뿐만 아니라 여원치, 관음치 등에서도 대적했다. 지형이 계곡 안이라 포위당한 동학농민군은 민보군의 집중사격에 몸을 가리기 바빴다. 이에 후발 동학농민군은 인근 마을 초가집 부엌문을 뜯어 가슴에 안고 총알받이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투는 14일 새벽 4시께부터 15일 아침 8시까지 약 28시간에 걸쳐 전개됐다. 이 전투로 관군과 민보군은 30여 명이 전사한다. 그러나 동학농민군도 크게 타격을 입는다. 이용석, 박중래, 고한상, 조한승, 황경문 등 지도자 5명이 전사한 것이다. 김홍기는 부대를 다시 남원성으로 후퇴시킨다.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지만 패배한 것은 사실이다. 이후 진주에서 일본군이 달려오면서 남원의 동학세력은 사기가 크게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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