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풍경에서 찾는 한잔의 여유 ‘경동 169번지 유영목 잡화점’ [알보달보 인천지역유산·(2)]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싸리재 잡화점의 비밀
인천 중구 경동사거리에서 애관극장을 지나 배다리로 이어지는 좁고 완만하게 굽이진 언덕길(사진)에는 ‘싸리재’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1899년 9월 경인철도가 놓이기 전, 인천 제물포항에 내린 이들이 걸어서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넘었을 것으로 많은 이들이 짐작하고 있는 길이다. 차 두 대도 동시에 지나가기 버거운 좁은 2차선 도로를 걷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비효율’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도나 효율성 대신 조금 느린 걸음을 선택한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 되어주는 길이다.
신도시의 반듯하게 잘 정돈된 길은 효율적이지만 금세 지루해진다. 반면 싸리재를 걸으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주변 풍경이 바뀌어 지루하지 않다.

이 길을 걷는 것은 마치 짜임새 있게 만들어진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신호등에 걸음을 방해받지 않고 길 양옆의 상점들을 시야에 담고 걷다 보면, 100여년 전 제물포항에서 내려 이 길을 걷던 사람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한다.
신포시장 건너편 경동사거리부터 시작해 배다리까지 약 500m 길이의 싸리재 길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이 길은 인천 근현대사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지층과도 같아서 제법 오랜 시간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도로명 주소가 익숙한 이들은 이곳을 ‘개항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른바 ‘힙’한 곳을 찾아다니는 이들에게는 개항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천에서 시간을 오래 보낸 인천사람들은 ‘싸리재’라는 이름이 더 정겹고 익숙하다.
‘경동사거리~배다리’ 500m 길이의 거리
영화·드라마처럼 지루하지 않은 풍경들
세월이 더딘 이곳에 목조건물 카페 눈길
1920년 지은 ‘ㄷ’자 형 개량 한옥 안채에
1930년 양옥 바깥채 증축 결합 ‘ㅁ’ 구조
한일 융합한 양식 시대적 특성 잘 드러나
진동벨 없이 직접 커피 가져다주는 방식
느리고 번거롭지만 더할 나위 없는 선물
‘싸리재의 브레이크’ 카페 싸리재

싸리재 길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느끼고, 알아보고 싶다면 이 언덕길과 같은 이름을 가진 카페 ‘싸리재’부터 시작하면 좋다. 아니면 이곳에서 중간에 쉬었다 가거나, 마무리할 것을 조심스럽게 권한다. 이 세상 빠른 변화의 속도를 줄여주는 제동장치 같은 공간이 바로 싸리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변화를 잠시 멈추게 하는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 같다는 생각도 든다.
경동 169번지, 싸리재 중간 즈음에 자리를 잡고 있는 카페 ‘싸리재’는 목조 건물이다. 1920년에 지어진 ‘ㄷ’자형 개량 한옥 안채와 1930년에 증축된 2층 양옥 바깥채가 결합한 ‘ㅁ’자형의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카페 싸리재는 ‘유영목 잡화점’이라는 명칭으로 지난해 인천지역유산에 선정됐다. 인천시 지역유산 조사연구 최종보고서는 “건물의 건립 연대와 소유주가 비교적 명확히 밝혀져 있고, 한일 간 융합된 건축양식을 보이는 등 당시 시대적 특성이 잘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건물 이력을 확인해보면 토지대장에는 1911년부터 기록이 시작되고 건축물대장에 1920년 9월9일 신축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10~192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길가와 맞닿은 2층 건물 천장에 쓰여 있는 ‘소화(昭和) 5년 상량’이라는 문구는 1930년에 증축한 사실을 알려준다.
현재 건물 소유주 박차영(76) 사장은 1979년부터 이 일대에서 의료기기 상점을 운영해오다 1993년 현 건물을 인수했다. 카페에 걸어 둔 ‘의료기기 판매업 신고증’에는 신고번호 ‘제1호’와 ‘경기의료기’라는 업소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신고증은 중구보건소장이 1979년 10월 발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 사장은 의료기기 상점을 운영하며 제법 큰 돈을 만졌다. 거래처를 관리하는 영업사원을 여럿 두었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의 풍파 속에서 서서히 내리막을 걸었다.
홀로 겨우겨우 의료기기 상점을 운영해오다 2012년 사업을 정리하고 훌쩍 배낭여행을 떠났다. 박씨는 카페 문을 열기로 하고 2013년 공사를 시작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장사를 시작하려고 건물 수리를 시작했지만, 집의 내력과 마주하면서 일이 커졌다. 건물을 뜯어내니 오래된 목재와 벽체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20일로 계획된 공사가 5개월로 늘었고, 공사비 견적도 980만원에서 7천만원까지 뛰었다.
옛 이야기 품은 싸리재

애초 단층 한옥으로 지어진 이 집 길가 쪽이 2층 상점으로 변모한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싸리재를 싸리나무가 많아서 싸리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긴 하지만 정말 싸리나무가 많아서 그랬는지 또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싸리재에는 ‘축현(杻峴)’이라는 이름이 개항 이후부터 여러 기록에 등장한다. 싸리나무와 고개라는 뜻의 한자의 조합이다.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이 쓴 ‘시간을 담은 길’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배성수 부장은 “싸리재 한자 이름이 개항 이후부터 등장하는데, 그 전에는 싸리재가 인적 드문 고갯길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싸리재를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이 고개가 개항장에서 서울 가는 길로 이용되면서부터”라고 설명하고 있다.
축현과 싸리재 외에도 이곳을 부르는 이름에 ‘삼리채(三里寨)’가 있다. 삼리채란 청국 정부가 인천에 두고자 했던 조계지였다. 지금은 사라진 경동파출소 주변이 삼리채 조계에 포함되었던 곳이다. 축현과 싸리재처럼 고갯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동사거리 주변의 공간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쓰였다. 중국인들은 축현이라는 지명보다 삼리채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 정부는 중국인과 관련된 사항을 기록할 때 삼리채로 기록했고, 조선인에 대한 내용에서는 축현으로 표기를 달리 했다. 삼리채는 또 ‘3리의 마을’이라는 뜻도 있는데, 이는 청국영사관에서 싸리재에 이르는 거리가 3리, 즉 약 1.2㎞가 되기 때문에 만들어진 지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싸리재에는 아는 만큼 보이는 풍경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인천 최초 백화점이었던 항도백화점 터, 12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애관극장, 용동 권번 표지석, 국가지정문화유산 답동성당, 한때 의료타운을 형성하게 한 인천기독병원 등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인천 최고의 번화가였다. 은행과 영화관이 성업했고, 신신예식장을 비롯한 예식장과 금은방, 양복점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지금 카페로 쓰이고 있는 싸리재 또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인천의 거부 유군성(1880~1947)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유군성은 1880년 강화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인천으로 거처를 옮겨와 스물아홉 살부터 목재상을 시작했고, 정미업으로 큰 부를 일군 인물이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1924년에 문을 연 ‘유군성정미소’는 정미기 5대를 갖추고 남녀 직공 70여명이 하루에 현미 250석, 정미 100석을 처리했다. 유군성은 여러 선행도 했는데, 현 동산중·고교의 전신인 인천상업전수학교 설립에도 거액을 기부하는 등 사업가로 덕망가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유군성은 슬하 4남3녀 가운데 차남인 유영목(1909~1978) 내외의 독립을 위해 이 싸리재 건물에 포목점을 내줬다고 한다. 유영목은 ‘금룡상회’를 운영하며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유영목의 3남인 유재권씨가 싸리재를 방문해 박차영 사장과 만나며 알려졌다. 경인일보가 2017년 펴낸 ‘인천 고택 세월의 문을 열다’에는 유재권씨 이야기가 담겨있다. 유재권은 “조부와 부친의 흔적이 있는 공간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점이 무척 감격스러웠다”며 “우리가 옛 건물을 함부로 허물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이러한 이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싸리재 찾는 이들의 쉼터

싸리재 카페는 요즘 커피전문점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요즘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선 진동벨이 없다. 대신 박 사장이 직접 엄선한 원두를 볶아 모카포트로 내린 뒤, 손님 테이블까지 직접 커피를 가져다 준다. 효율성이 미덕인 시대에 조금은 느리고 번거로운 방식이다. 여기에는 싸리재가 언제든,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라는 박차영 사장의 마음이 담겨 있다. 박 사장은 싸리재에 대해 말한다.
“도심 한복판에 횡단보도 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길은 이제 이곳뿐입니다. 큰길은 사람을 갈라놓지만, 이런 골목은 사람을 모이게 하거든요. 힘이 닿는 데까지 이곳 싸리재에서 계속 일하며 사람들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김성호 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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