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중환의 진화의 창]다 유전자 때문이라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6. 2. 1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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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에서 성장 배경에 대한 부분은 대개 비슷하다. 어려서 겪은 가정 환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역설한다. “항상 책을 가까이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저는 독서를 즐기고 총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엄격한 훈육을 받아 저는 예의 바른 성품을 길렀습니다.” 어릴 때의 환경이 과연 그렇게 중요할까? 지능이나 성격은 타고날까, 아니면 만들어질까?

코흘리개 아이를 ‘초등 의대반’을 대비한 학원에 일찌감치 보내는 부모는 종종 “공부 머리는 유전의 영향이 약 50%나 된다”는 핀잔을 듣는다. 반면에, 자기 유전자를 탓하며 공부를 놓은 수험생은 “환경의 영향도 나머지 절반이란 말이니, 유전자를 핑계 대지 말고 노력하라”는 선생님의 훈계를 듣는다. 지능뿐만 아니라 성격, 행복, 정신 장애, 종교적 성향, 정치적 성향, 알코올 의존성, 이혼 가능성 등 거의 모든 형질에서 ‘유전가능성(heritability)’은 대략 50%를 넘나듦을 행동 유전학자들은 수없이 발견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릴까? 키의 유전가능성은 약 80%다. 영수의 키가 180㎝라면, 144㎝는 유전자 덕분이고 36㎝는 환경 덕분이란 말일까? 그렇지 않다. 유전가능성은 ‘어느 한 사람’이 지닌 형질 가운데 유전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아니다. 유전가능성은 ‘어느 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 간 형질 변이 가운데 유전자에 따른 변이가 차지하는 비율이다.

예를 들어, 손가락 개수를 생각해보자. 딱 다섯 개다. 유전자에 박힌 형질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 유전가능성은 매우 높을까? 아니다. 거의 모든 이가 다섯 손가락을 지니고 태어난다. 어떤 사람들은 자라면서 사고로 손가락을 한두 개 잃는다. 그러므로, 손가락 개수의 유전가능성은 0에 가깝다. 손가락 개수에서 관찰되는 개체 간 변이는 대부분 환경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 어느 나라에서 빨간 머리 아이들은 바지를 무조건 엉덩이 아래까지 축 내려 입도록 법으로 강제한다고 하자. 특정한 유전자가 머리카락을 붉게 만드는 색소 합성에 관여한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이른바 ‘똥 싼 바지’ 패션의 유전가능성은 매우 높게 나올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빨간 머리를 만드는 유전자가 똥 싼 바지를 입게 만드는 ‘통계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예에서 보듯이, 유전가능성은 유전자가 형질을 만드는 원인인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유전가능성은 유전자가 그 형질을 실제로 어떠한 기제를 통해 만들어내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빨간 머리 유전자로부터 똥 싼 바지 패션으로 이어지는 인과 사슬은 빨간 머리 사람에게 똥 싼 바지를 강요하는 희한한 법을 폐지하면 바로 끊어진다. 즉, 어떤 형질이 유전된다는 사실은 적절한 환경적 개입을 통해 현 상황을 바꿀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전자가 어떤 형질의 원인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유전자가 이를테면 키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은, 만약 내가 부모로부터 다른 유전자 조합을 물려받았다면 그 가상적 상황의 내 키는 오늘날의 내 키와 달라졌을 수 있다는 뜻이다. 결코 유전자가 키를 몽땅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키가 유전이라고? 웃기시네! 내 친구는 부모님 두 분 다 장신인데 걔는 엄청 작거든!”이라는 항변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셈이다. 감기약을 먹으면 감기에서 회복될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약을 먹었는데 차도가 없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도 우리는 감기약이 환자를 낫게 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적 요인은 어떨까? 환경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공유 환경’은 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공유하는 환경이다. 만약 아버지가 가정폭력을 일삼는다면, 이는 자녀들이 공유하는 환경의 일부다. 가정이 부유하거나, 시골에 있거나, 매주 함께 절에 가거나, 부모가 엄격하게 자녀를 키우거나, 독서를 장려하는 집안 분위기 등이다.

‘비공유 환경’은 형제자매끼리도 공유하지 않는, 그 밖의 모든 환경 요소다. 파티에서 운명의 연인을 만나거나, 수능 시험 날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막내로 살아가거나,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기 등이다.

요컨대, 모든 행동 형질의 원인은 유전자, 공유 환경, 혹은 비공유 환경의 조합에 있다. 유전자 결정론을 연상하는 이들의 오해와 달리, 유전자가 어떤 형질의 원인이라는 말은 유전자가 그 형질을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 결과가 일어날 확률을 높여줄 따름임을 의미한다. “환경의 영향도 나머지 절반이란 말이니, 유전자를 핑계 대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는 훈계가 타당한지는 다음에 살펴보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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