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곁을 지킨 ‘절름발이’ 군관 황대중

노성태 2026. 2. 1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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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53) 황대중
-황대중, 두 다리를 절다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곁을 지킨 ‘절름발이’ 군관이 황대중이다. 황대중(黃大中, 1551-1597)이 절름발이었음은 그의 호 양건당(兩蹇堂)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양건당의 ‘양’(兩)은 ‘둘’, ‘건’(蹇)은 ‘절다’라는 뜻이니, ‘양건’은 ‘두 다리를 다 절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붙여진 호가 양건당이었다. 그런데 두 다리를 절게 된 사연이 기가 막힌다.

황대중이 왼쪽 다리를 절게 된 것은 지극한 효성 때문이었다. 어머니 강씨가 학질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황대중은 자신의 왼쪽 허벅지 살을 베어 약으로 쓰게 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된다. 이후 사람들은 황대중의 효성에 감복해 그를 ‘효건’(孝蹇) 즉, ‘효성의 절름발이’라 불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의 효심이 알려져 십리 밖까지 조문객의 행렬이 늘어섰다고 한다. 효성이 조정에 전해지자, 임금은 정릉참봉 벼슬을 내리지만 거절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그가 찾아간 곳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본영이 있는 한산도였다. 그는 이순신의 군관이 됐고, 이순신과 함께 함대를 이끌고 거제도 앞바다를 지나다 왜군이 쏜 조총에 오른쪽 허벅지를 맞는다.

이순신은 대중의 다리를 어루만지면서 “옛날은 효건이었는데, 오늘은 또 충건(忠蹇)이구나!”고 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황대중을 “한 다리는 부모에게, 다른 한 다리는 나라에 바쳐 다리를 절게 되었다”며 ‘양건’이라 부르게 된다.

- 전라도 별초군 대장이 되다
두 다리를 어머니와 나라에 바친 양건당 황대중은 황희 정승의 5대손으로, 1551년(명종 6) 한양에서 황윤정과 진주 강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어릴 적 이름은 유(萸)였고, 고친 이름이 대중이다. 황대중은 영암군수로 있던 조부 황응을 따라 강진군 작천면 구상리로 내려왔고, 이후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게 된다. 황대중이 남도땅 강진과 인연을 맺은 연유다.

임진왜란은 그에게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1590년(선조 23), 조선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황윤길이 친척이었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청병사 황진은 6촌 형이었다.

이순신과도 각별한 사이였다. 1591년(선조 24)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기 직전 이순신을 보성관에서 만나 인연을 맺는다. 정읍 현감이던 이순신은 진도군수에 임명됐다가 부임 도중 가리포(완도) 첨사로 재발령됐고, 또 부임 직전에 전라좌수사에 임명된다. 황대중이 반곡 정경달과 함께 보성관으로 이순신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양건당 문집’에 나온다. 보성관에서 만났으니, 아마도 진도군수로 임명돼 부임하는 자리였을 것 같다.

이순신은 황대중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뒤 “병법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높게 평가했고, “슬기로운 계책을 꾀할 줄 아는 선비는 사물을 보고 느끼는 생각이나 의견이 같다”며 크게 칭찬한다.

황대중은 이때의 인연을 잊지 않았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살아남은 후 한산도의 이순신을 찾았던 것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은 도승지 이항복의 제안을 받아들여 8도에서 무예가 뛰어난 인물들을 모집했다. 별초군이 그것이다. 전라도에서도 별초군을 뽑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황대중이 아니면 누가 별초군이 될 수 있겠는가”했다. 그는 전라도 별초군 80명에 뽑혔고, 별초군의 우두머리를 맡게 된다. 그리고 80명 별초군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 의주로 피난 가는 임금을 모시고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호위한다.

- 이순신의 군관이 돼 곁을 지키다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자, 그에게 내려진 임무는 이여송의 명군을 안내하는 일이었다. 그는 전도비장(前導裨將)이 돼 남하하다 문경새재(조령)에서 충청병사인 6촌 형 황진을 만났고, 황진을 따라 의령·함안을 거쳐 들어간 곳이 진주성이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6월21일부터 29일까지 지속됐다. 10만에 가까운 일본군이 남하해 진주성을 향하자, 도원수 권율과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는 승산이 없다면서 철수해 버린다.

고립무원의 진주성을 지키겠다고 들어간 분은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그리고 황대중의 6촌 형 황진 등 전라도 의병장들이었다.

6월28일 충청병사 황진이 적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고 이튿날 성이 함락되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황대중은 성을 탈출, 2년 전 보성관에서 만난 이순신이 있는 한산도를 찾는다. 황대중이 이순신을 찾아가자, 이순신은 황대중의 손을 잡고 반갑게 맞이하고는 “부모께 효도를 하다 다리를 절개된 아들이 왜적의 칼날을 꿰뚫고 이곳에 도착하니 어찌 뜻하지 않는 바라고 하리오”라며 눈물을 흘린다.

이후 황대중은 이순신의 군관이 돼 이순신의 곁을 지키면서 각종 전투에 참여한다. 1594년(선조 27), 왜선이 한산도에 침입해 오자, 황대중은 유엽전(柳葉箭)을 쏘아 왜장을 거꾸러뜨린다.

이순신은 “하늘이 대중을 태어나게 했고, 대중은 왜장을 쏘아죽였다”라고 하며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동년 10월1일 거제도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려는 순간 왜적의 탄환이 오른쪽 다리에 박힌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황대중이 ‘양건’이라 불리게 된 연유다.

1597년(선조 30), 이순신은 왜군이 거짓으로 꾸민 밀서를 그대로 믿은 조정에서 출전 명령을 내렸지만 응하지 않았고, 조정은 이를 구실로 이순신을 파직한다. 이어 원균이 3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됐고, 조선 수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궤멸되자,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교지를 받은 것은 동년 8월3일 경상도 진주 손경례의 집이었다.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곧장 전라도 땅 구례로 향했다. 이때 군관 9명과 병사 6명이 이순신을 호위했다. 그 군관 중 한 명이 황대중이었다.

- 남원성에서 순국하다
황대중은 3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과 함께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8월 3일 구례, 4일 곡성, 5일 옥과에 이른다.

옥과에 머무르고 있던 8월6일 “남원이 위급하니 군영마다 제일 뛰어난 군관 한 명을 선발해 보내라. 수군에서는 황대중을 보내라”라는 체찰사 이원익의 문건이 도착한다. 이순신은 난감했지만, 군령을 어길 수 없었다. 황대중이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과 이별한 후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부대에 합류, 남원성에 도착한다.
군관 황대중이 순국한 현장, 남원성

1597년(선조 30) 8월12일부터 왜군 5만8천여 명의 공격이 시작됐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해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천여 군사와 명나라 부총관 양원의 3천여 군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8월16일 남원성은 함락되고 성민 6천여 명을 포함한 1만여 명이 혈전 분투하다 장렬하게 순절한다. 그 속에 황대중도 포함돼 있었다.

그가 쓰러지자, 왜군은 그의 호패를 보고 비단을 찢어 ‘조선 충신 황대중’이라 써 그의 시신 곁에 나무를 세워 글씨를 건다.

그는 왜군마저 인정한 충신이었다. 왜군이 물러가자, 황대중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주부 김완이 달려온다. 황대중은 김완에게 “나의 시체를 거두어 말에 실어서 집에 보내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말은 300리를 달려 강진 구상마을에 도착했고, 부인과 19살 아들 정미가 달려 나와 시신을 붙잡고 목 놓아 운다.

이순신도 황대중의 순국 소식을 접하고 슬픔에 빠진다. 이순신은 완도 고금도에 본영을 정한 동년 12월4일 황대중을 애도하는 글을 짓고 제사 음식을 마련해 사람을 보내 술을 올린다.

- 말 무덤이 만들어지다
양건당 황대중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구상마을을 찾아야 한다. 마을 입구에는 그를 기리는 충효정려비각이, 마을 뒷산에는 그의 무덤이, 마을 앞에는 그의 시신을 날랐던 말의 무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황대중 시신을 옮긴 말을 묻은 무덤. ‘애마총’(강진군 작천면)

양건당 황대중 충신·효자 정려

황대중은, 왼쪽 다리는 어머니에게 오른쪽 다리는 나라에 바쳤으니, 충·효를 실천한 충신 효자가 아닐 수 없다. 그를 기리는 충효정려각은 담장으로 둘러쳐 관리되고 있었다. 담장 안의 소나무와 배롱나무가 일품이다. 소나무 옆에는 ‘양건당장수황공휘대중충효추모비’(兩蹇堂長水黃公諱大中忠孝追慕碑)가 서 있다. 그리고 충효문을 지나면 한 칸짜리 팔작지붕의 정려각이 나오는데, ‘兩蹇閭’(양건려)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양건당 황대중 충효정려 ‘양건려’

양건당 황대중 충효추모비

정려각 안에는 ‘충신효자 행정릉참봉황대중지려’(忠臣孝子行貞陵參奉黃大中閭)라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각은 1795년(정조 19)에 건립한 것이니, 그의 사후 198년이 지난 후였다. 정려각이 세워진 이후 또 230년이 흘렀으니, 양건당 황대중은 정려와 함께 영원히 살고 있는 셈이다.

정려각에서 500여 m 떨어진 논 가운데에 황대중의 두 다리가 돼 준 애마를 묻은 무덤이 있다. 무덤의 규모도 놀랍다. 무덤 앞에 비를 세웠는데 ‘양건당애마지총’(兩蹇堂愛馬之塚)이다. 비 기단부에는 말도 새겨져 있고, 무덤 옆에는 말에 탄 황대중의 동상도 서 있다.

말의 무덤은, 말에 대한 주인의 최대 예우다. 1597년(선조 30) 8월16일 황대중이 남원성에서 전사하자, 김완이 그의 시신과 유품을 말에 실었고, 말은 300리 길을 밤낮으로 달려 강진 구상마을에 도착한다. 주인의 장례가 치러지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 주인을 따라 세상을 뜬다. 양건당 황대중의 다리가 돼준 말이 죽자, 가족들은 말의 충심에 감동하여 주인이 묻힌 묘에서 바라보는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 준다. 4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묘는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말과 주인과의 믿음과 신뢰가 4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감동이다. 애마의 주인 황대중의 무덤은 마을 뒷산 자락(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548)에 있어 애마를 바라보고 있다.

2007년 양광식은 그의 충과 효를 ‘조선 충신 양건당 황대중 장군과 애마(愛馬)’라는 이름으로 편찬해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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