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인사이드] 검은 황금, 석탄의 재발견
AI 데이터센터 전력난, 석탄 발전의 경제성 재평가 불러와
한국 정부 2040 탈석탄 기조와 충돌
통상 압박과 기후 목표 사이 진퇴양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전 지구적 합의 아래 퇴출 1순위로 꼽히던 석탄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력한 드라이브와 인공지능(AI) 산업의 폭발적인 전력 수요를 등에 업고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석탄 산업 활성화 행사에서 "한국, 일본, 인도 등과 석탄 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역사적인 무역 합의를 체결했다"고 기습 발표했다.

트럼프의 아름다운 석탄, 한국 경제를 겨누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로 석탄을 수출하고 있다. 석탄은 국가 안보에 중요하며, 철강부터 조선, 그리고 AI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필수적이다."
그가 서명한 행정명령은 미 국방부(펜타곤)가 석탄 발전소와 전력 구매 협정을 체결하도록 강제하고, 환경보호청(EPA)이 온실가스 규제의 근거로 삼았던 위해성 판단(Endangerment Finding) 규정을 공식 폐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해성 판단은 2009년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온실가스 6종(이산화탄소, 메탄 등)을 인간의 건강과 복지를 위협하는 오염물질로 규정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 당시 마련되었으며 이를 근거로 미국 정부는 자동차 연비 규제, 발전소 탄소 배출 제한 등 강력한 기후 정책을 시행해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폐지한다는 것은 연방 정부 차원의 기후 규제 법적 근거를 무력화한다는 의미다. 트럼프 대통령은 석탄을 "깨끗하고 아름다운(Clean Beautiful) 에너지"라고 칭송하며 오바마 행정부를 계승한 바이든 전 행정부의 환경 규제를 "파멸적인 길"이라고 맹비난했다.
문제는 한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일본, 인도와 함께 콕 집어 거론하며 석탄 수출의 주요 대상국임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지난해 관세 협상 당시 에너지 구매 확대에 합의한 것은 맞지만 구체적인 품목으로 석탄을 특정한 바는 없다"면서도 "총액 1000억 달러를 맞추기 위해서는 미국의 요구를 일부 수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미국이 한국에 석탄 구매를 강요하는 배경에는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의 표심을 결집하려는 정치적 계산과 함께 막대한 무역 적자를 해소하려는 경제적 셈법이 깔려 있다.
특히 미국산 유연탄은 셰일 혁명 이후 가격 경쟁력을 잃고 내수 시장에서 고전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출을 통해 활로를 찾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셈법은 복잡하다. 당장 이재명 정부는 2040년 탈석탄을 에너지 정책의 핵심 기조로 삼고 있다.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대폭 늘리고 노후 석탄화력발전소를 조기 폐쇄하겠다는 로드맵이 가동 중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산 석탄 수입 확대는 정책적 정합성을 훼손할 수 있이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과 달리 아직 구체적인 계약서에 석탄이 명시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1000억 달러라는 거대한 약속 금액을 채우기 위해선 LNG와 원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통상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지난해 한국의 대미 에너지 수입액 중 석탄 비중은 2.7%(약 6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은 우리 전력 수급 계획의 대수술을 의미한다. 정부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검토 중"이라는 신중한 입장이지만, 사실상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왜 다시 석탄인가?
챗GPT 이후 생성형 AI 모델이 거대화되면서 데이터센터가 소모하는 전력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2030년까지 현재의 3배 이상 폭증할 것으로 전망했다.
문제는 이 막대한 전력을 감당할 공급원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들쭉날쭉한 간헐성 문제로 인해 24시간 가동되어야 하는 데이터센터의 기저부하(Base Load) 전원으로는 한계가 있다. 원자력 발전은 건설에 10년 이상이 소요된다.
단기간에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대규모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석탄이 다시 소환된 배경이다. 당장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밀집한 버지니아주와 오하이오주 등에서는 이미 폐쇄 예정이었던 석탄 발전소의 수명 연장 논의가 활발하다.
기술 패권적 측면에서도 의미심장하다. 당장 업계에서는 "AI 산업의 핵심 경쟁력은 이제 알고리즘이 아니라 전력 확보에 달려 있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석탄을 AI 산업의 필수 요소로 규정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미국의 기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 안보 전략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일본의 대미 투자 1호 프로젝트는 오하이오주에 330억 달러(약 47조 원)를 투입해 9.2기가와트(GW) 규모의 가스 및 화력 복합 발전소를 건설하는 사업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원전 9기에 맞먹는 용량으로 미국 내 데이터센터 전력난 해소에 기여하며 통상 마찰을 줄이는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다.
이런 가운데 국내 에너지 업계는 미국의 통상 압박이 현실화될 경우를 대비해 시나리오별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다.
현재 한국남동발전, 한국남부발전 등 국내 발전 공기업들은 주로 인도네시아와 호주에서 유연탄을 수입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산 석탄 비중은 전체 수입량의 5~10% 수준에 불과하다.
다만 발전사 관계자들은 미국산 유연탄의 수입 확대가 기술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한 발전사 고위 관계자는 "미국산 석탄은 발열량이 높고 황 함유량이 낮은 고품위 탄이 많아 발전 효율 면에서는 우수하다"며 "다만 호주나 인도네시아산에 비해 운송 거리가 멀어 물류비가 높고, 가격 변동성이 크다는 것이 단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정부가 에너지 안보와 통상 협력 명분으로 미국산 석탄 구매를 늘리도록 유도할 경우, 발전 단가 상승이 전기요금 인상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현재 한전의 누적 적자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가의 미국산 석탄 도입은 재무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
민간 발전사들의 셈법은 더욱 복잡하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석탄 사용 확대는 투자 유치와 신용등급 평가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 발전사 임원은 "정부가 앞에서 탈석탄을 외치고 뒤에서는 미국산 석탄 구매를 종용한다면 기업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느냐"며 "명확한 시그널과 함께, 석탄 구매에 따른 탄소배출 비용 증가분을 상쇄할 수 있는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트럼프의 석탄 부활론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에너지 가격 급등과 전력 안보 위기 속에서 유럽과 아시아 주요국들도 탈탄소 이상주의에서 벗어나 에너지 실용주의로 선회하고 있다.
독일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스 공급이 불안해지자 폐쇄했던 석탄 발전소를 재가동했고, 중국은 재생에너지 설비를 늘리는 동시에 에너지 안보를 위해 2025년에만 78GW 규모의 신규 석탄 발전소를 승인했다. 지난 10년 만에 최대 규모다. 인도 역시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석탄 생산량을 매년 늘리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흐름은 한국에게 2040 탈석탄 목표 수정을 강요한다.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당위성과 에너지 안보 및 통상 이익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시작된 것이다.

"검은 코끼리가 방 안에 들어왔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18일 오전, 유튜브 접속 장애로 온 국민이 디지털 블랙아웃의 불편을 겪었다. 연결이 끊긴 세상의 답답함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전기에 의존해 살고 있는지를 일깨워주었다. AI, 자율주행, 클라우드 등 우리가 꿈꾸는 미래 산업은 모두 전기를 먹고 자란다. 그리고 그 전기를 만드는 가장 오래된 방식인 석탄이, 가장 최신 기술인 AI를 위해 다시 호출되었다.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 모두가 알고 있지만 누구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껄끄러운 문제를 뜻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 경제에 있어 미국산 석탄은 바로 그 코끼리다.
이재명 정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다주택자를 비판하며 부동산 개혁을 외치는 동시에,집값 하락을 막아야 하는 모순처럼 탈석탄을 외치면서 트럼프의 석탄을 사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 등 야당은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에너지 정책을 연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여야의 정쟁으로 풀 문제가 아니라는 분석이다.
트럼프의 청구서는 이미 발송되었다. 1000억 달러라는 숫자는 냉혹한 국제 정치의 현실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석탄을 사느냐 마느냐의 차원을 넘어, 이 구매를 통해 우리가 얻어낼 국익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미국산 석탄을 수입하는 대신 우리의 수소 환원 제철 기술이나 차세대 원전(SMR) 기술에 대한 미국의 투자나 협력을 이끌어낼 수는 없을까? 혹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보조금 혜택을 방어하는 카드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석탄의 재발견은 에너지원이 무기화되고 환경 규제가 무역 장벽으로, 혹은 협상 카드로 변모하는 새로운 시대의 예고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검은 돌덩어리를 단순한 연료가 아닌, 복잡한 통상 외교의 전략 자산으로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