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시간이 만든 장르, 유해진

하은정 기자 2026. 2. 18.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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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쇼박스 제공

[우먼센스] 극장가에 묵직한 사극 한 편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왕과 사는 남자>는 개봉 초반 100만 관객을 돌파한 데 이어, 개봉 15일 만에 누적 관객 수 400만을 넘어섰다. 설 연휴 이후에도 관객 수는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 단발성 화제에 기대기보다 관객의 체온을 타고 서서히 번져가는 흐름이다. 오랜만에 정통 사극이 보여준 저력. 작품의 결처럼 요란하지 않되 단단하게 쌓여가는 흥행이다.

영화는 1457년 청령포에서 시작한다. 왕위를 빼앗긴 어린 선왕 이홍위(박지훈)가 유배지로 향하고, 그를 맞이하는 이는 광천골 촌장 엄흥도(유해진)다. 기록은 짧지만, 상상은 길다. 교과서에 적히지 않은 시간, 역사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거창한 정치 서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다. 작품은 권력 다툼 대신, 상처 입은 소년과 한 어른의 연대를 중심에 둔다.

무엇보다 영화의 중심에는 유해진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를 넘어, 이름 자체가 하나의 장르처럼 기능해왔다. 능청스러움과 비애, 생활감과 서늘함을 한 얼굴에 담는 배우. 그의 등장은 화면의 공기를 바꾸고, 인물의 결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사진 쇼박스 제공
사진 쇼박스 제공

최근 몇 년간 그는 비교적 무게감 있는 작품에 집중해왔다. 코미디의 결보다는 침묵과 긴장에 방점을 찍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더 반갑다. 오랜만에 전면에 나선 '유해진표 생활형 코미디'가 극의 중심을 이끈다. 상황을 밀어붙이는 웃음이 아니라, 인물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는 인간적인 유머다. 이번 흥행의 배경에는 그의 코믹 연기 복귀가 분명히 자리한다.

눈에 띄는 대목은 또 있다. 유해진은 아직 단 한 편의 OTT 오리지널에도 출연하지 않았다. 플랫폼이 급변한 시대에도 그는 꾸준히 극장을 택했다. 이 일관된 선택은 어느새 '희소성'이 됐고, 자연스럽게 '영화 전문 배우'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이번 흥행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스크린을 향한 그의 외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명이다.

연출은 장항준 감독이 맡았다. 유해진의 웃음이 은은하게 번지는 타입이라면, 장 감독의 유머는 비교적 직선적이다. 결은 다르지만 온도는 같다.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인간적인 웃음. 두 사람의 조합은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단종 역을 맡은 박지훈 역시 호평을 이끌고 있다. 어린 왕의 고독과 불안을 과장 없이 풀어낸 연기는 극의 정서를 단단히 붙잡는다. 유해진과의 호흡은 연대의 감정을 설득력 있게 완성한다.

유해진은 작품 선택의 기준을 묻는 질문에 "재미"라고 답했다. "꼭 웃긴다는 뜻은 아니다. 왜 이 영화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최근에는 한 가지 질문이 더해졌다고 했다. "관객이 과연 극장까지 와서 볼 만한 영화인가."

사진 쇼박스 제공

엄흥도에 대해서는 "영웅이라기보다는, 끝까지 곁에 있어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의리를 지킨 인물. 그 진심이 제대로 전해지는 것이 목표였다고 했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밖을 걸으며 대사를 반복했다는 그는 "되뇌다 보면 대사가 몸에 붙고, 그때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말했다.

흥행 부담에 대해서는 솔직했다. "요즘은 제작비가 크면 겁부터 난다. 본전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그럼에도 그는 극장을 믿는다. "영화가 잘돼야 또 다른 투자가 이어진다. 자극적인 것만 넘치는 시장보다, 영화다운 영화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번 작품이 오래 남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 사람이 죽음을 향해 가는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의 정서가 남는다. 무겁지만 어렵지 않다." 촬영 중에도, 분장실에서도, 시사회에서도 여러 번 울었다고 했다.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데뷔 28년 차. 롱런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건 없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서로 도우려 한다. 햇빛 좋은 날 현장에서 촬영하고, 끝나고 소주 한잔하는 그 시간이 좋다."

화려한 변신 대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얼굴로 돌아온 배우. <왕과 사는 남자>는 보여준다. 어떤 배우에게는 걸어온 시간 자체가 이미 장르라는 것을. 

하은정 기자 hah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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