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가 내쫓기는 세상, 작가 차학경을 다시 호출하다

한겨레 2026. 2. 1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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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
차학경 작가. BAMPFA 제공

“동포여?”

갓 구워져 나온 고기파이와 처음 보는 향신료들에 정신이 팔려있을 사이,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말을 건넸다. 서울 광희동, 외진 골목의 중앙아시아 식료품점. 지나가다 이국적인 간판을 보고 호기심에 들어가 본 곳이었다. 동포라는 말에서 노인이 고려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말엔 은근한 반가움이 묻어있어서 나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할 뻔 했다. 아니라고 답하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계산대 밖으로 일으켰던 몸을 숙여 자리에 앉았다. 그는 다시 평범한 나이 든 계산원의 얼굴이 되어, 익숙한 몸짓으로 파이 하나 값의 계산을 해주었다.

뜨거운 고기파이를 받아들고 거리에 나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고려인처럼 보였을까?

서울에서 태어나 이 땅을 떠나지 않은 채, 생물학적 성과도 불화하지 않으며 자라온 내가 일평생 이토록 이방인의 감각을, 디아스포라를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저 기만적인 우울감이 아닐까 고민한 적이 있다. 그 시절, W.G. 제발트가 이민자들의 삶을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추적한 ‘이민자들’의 짙은 멜랑콜리를, 한국전쟁 중 피난민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차학경이 쓴 ‘딕테’라는 강인한 저항을 마치 내 이야기처럼 읽었다.

‘딕테’를 펼치면 바로 보이는 것은 광막한 사막, 그리고 일본 도요스 탄광의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합숙소 벽에 새겨진 낙서를 촬영한 사진. 나는 강렬한 이미지의 병치에 단번에 사로잡혔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

차학경 책 ‘딕테’ 본문 사진. 문학사상 제공

고향을 빼앗긴 현 시대의 디아스포라. 만인이 만인에게 이방인이 된 이 끔찍한 폭력의 한가운데서, 지금 다시 차학경을 호출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2026년 세계엔 제국주의가 귀환했다. 선주민들을 몰살하곤 ‘이민자들의 나라’라 떵떵 대던 짧은 역사가 무색하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멕시코와 미국 사이 삼엄하고도 거대한 벽을 두른 것으로 모자라 자경단과 다름없는 연방이민세관단속국(ICE)에게 무한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들이 국가 안보라는 명분으로 자행하는 것들을 보라. 미국을 고향으로 삼은 이들이 피부색을 이유로 급습당해 영장 없이 체포 및 구금당한다. 백인들마저 단지 시위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다. 트럼프는 이민자를 추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혼종적 존재를 처벌하고 단죄하며 세계의 질서를 제국주의로 재편하고 있다. 야만으로의 회귀다.

차학경의 어머니 허형순. 문학사상 제공

차학경의 어머니, 허형순은 일제강점기에 만주 용정으로 피난했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만주의 한국인 학교에서 일본어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모국과 모국어는 안식처였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서울로 남하한 그들 가정은 이북식 말투로 인해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6.25 전쟁을 피해 또다시 피난 간 부산에서 차학경이 태어났다. 한국에 정착하지 못한 이들은 차학경의 나이 열한 살에 하와이로, 몇 년 뒤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차학경은 ‘테레사 학경 차’가 된다.

만주 벌판에서 일본어로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던 어머니의 피를 받았고, 남북 분단으로 남하했다가 하와이를 거쳐 미국 본토에 정착했으나 실은 어디에도 정착한 적이 없는 여자. 차학경은 미국에서 비교문학과 언어학을, 프랑스에서 영화 이론을 공부한 뒤 비디오, 행위예술, 전통적이지 않은 방식의 글쓰기 등을 매개로 어머니의 역사, 파편화된 기억,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 빼앗긴 언어, 식민지의 여성, 말하고 있으나 들리지 않음을 제3세계에서 온 여성으로서 끊임없이 표현하고 발산했다.

책의 제목인 ‘딕테’는 불어로 ‘받아쓰기’를 의미한다. 말하는 것을 받아쓰는 행위엔 이미 권력이 개입한다. 여성들, 제3세계 국가 민족들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잃고 대신하여 기록되고 교정되어 왔다. ‘딕테’엔 영어와 불어, 시와 이미지, 소설과 산문, 분단된 한반도, 기억과 공백, 번역과 인용, 역사 기록, 기도문, 증언, 개인적 체험이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다. 유관순과 잔 다르크, 자신의 어머니를 호명하며 교차하는 텍스트들은 독해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듯 난해하다. 읽는 것보다 ‘보는 것’에 가깝다. 차학경은 이 책에서 ‘bite the tongue’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혀를 물다, 입을 닫다, 말할 수 없다….

차학경의 책 ‘딕테’ 문학사상 제공

비디오 작업 ‘입과 입’(1975)은 차학경의 입술이 한국어 모음 8개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둥글게 벌린 입술의 클로즈업. 관객들은 지직대는 소음, 흐르는 수돗물 소리, 침이 넘어가는 소리를 듣지만, 정작 발음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또 다른 퍼포먼스 ‘보이지 않는 목소리’(1975)에서 차학경은 ‘AVEUGLE’(눈이 멀다)라는 글자가 새겨진 띠를 입에 묶고, ‘VOIX'(목소리, 의견)라는 글자가 새겨진 띠를 눈에 묶고 ‘단어’, ‘실패’, ‘나’, ‘~없이’ 등 단순한 영어와 불어 명사 및 전치사가 새겨진 배너를 펼쳐 든다.

이때 우리가 묻게 되는 질문은 오래된 것이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 말은 어디까지 들릴 수 있는가? 인도의 탈식민주의 여성학자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발화의 능력이 아니라 발화가 승인되는 구조를 겨냥했다. 말은 존재하지만, 청취의 공간이 봉쇄되어 있다. 발화는 발생하지만, 의미로 승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ICE는, 미국은, 세계는 개개인을 검열한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가?” 그들은 존재를 합법과 불법으로 가르며 추방하고 삭제한다. 차학경은 이러한 검열과 심문에 반대한다. 그의 예술세계엔 기원도, 자격도, 완결된 정체성도 없다.

이방인의 문제. 환대와 적대의 문제. 미국에만 한정된 이야기 같은가? 한국 내 중국인 혐오를 보라. 이것은 국경을 불문하고 지금 세상 어느 곳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자 화두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환대’ 개념은 쉽게 오인된다. 그건 여행객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전통 춤을 추며 환영한다는 뜻이 아니다. 환대는 타자를 이해하는 행위가 아니라 타자가 이미 이곳에 ‘도착해 있음’을 받아들이는 윤리다. 윤리는 지식보다 앞선다.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전부터 우리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타자를 내 언어로 판단하고 규정지어 나의 지식 체계에 포섭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이다. 타자를 마주했을 때의 말문이 막혀 멈추는 것.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환대다.

차학경은 이러한 레비나스식 환대를 탈식민주의와 디아스포라 속에서 급진적으로 수행한 예술가다. 그의 작품은 답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를 멈추게 한다. 누가 들리는가. 누가 사라지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멈출 수 있는가. 차학경 작품 세계의 불친절함은 보는 이들의 윤리적 선택을 촉구한다.

차학경의 ‘딕테’ 속 ‘19세기 누비아의 거상과 스핑크스’ 모습. 문학사상 제공

나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내가 왜 그토록 디아스포라를 느껴왔는가에 대해 나는 마침내 답을 찾았는가? 여기선 탈식민주의 여성주의를 강조한 찬드라 탈파데 모한티를 빗대 말할 수 있겠다. 모한티는 서구 여성주의가 제3세계 여성의 개별적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무시하고 공감과 연대를 호소하는 하나의 동질적 이미지로 묶어버렸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나는 여성주의 안에서도 서구 백인 여성 위주 여성주의의 우월적 태도가 불편한 사람이다. 나는 노동자로서 같은 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도, 같은 뜻을 지닌 운동가들과 투쟁하면서도, 그 어떤 소수자 커뮤니티 안에서도, 계급성의 간극 혹은 권력의 낙차를 감지하면 멈춰버리고 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핀셋처럼 좁은 땅 위에 서 있고, 그 땅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나는 결국 내 발밑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나는 일평생 어딘가에 진정으로 속하길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애매한 사람이다. 사이에 있는 사람이다.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렇기에 무엇에도 머물지 않고 어떤 것도 규정하지 않으며 오로지 발화함으로써,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표표히 드러낸 차학경은 언제나 내게 위대한 예술가였다.

차학경은 ‘딕테’가 출간된 후 3일 뒤, 연쇄살인범에 의해 강간 살해 당했다. 31살의 나이였다. 범행 수법의 잔혹함은 작가로의 작품 세계가 그 이르고도 안타까운 죽음에 가려지지 않도록 기술하지 않겠다. 여전히 그의 영혼은 ‘딕테’에, ‘입과 입’에, ‘보이지 않는 목소리’에, 미완으로 남은 영화 ‘몽골의 하얀 먼지’에, 현재 미국 버클리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두 번째 회고전에 전시된 다른 작품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녀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계속 살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치지 않고 계속 쓸 수만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글을 씀으로써 실제의 시간을 폐기할 수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살 것이다. 그녀 앞에 그것을 전시해놓고 그것의 엿보는 자가 될 수 있다면.’

‘딕테’에서의 한 구절처럼, 어떤 작가들은 글 속에서 영영 살아있다. 나는 글 속에 살아있는 차학경을 질투한다. 어떻게 시기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을 떠난 지 약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그의 저항을,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소리친 그 목소리를.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은?

이예지 에디터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을 질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부러운 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지요. 이예지 에디터가 <GQ>, <아레나>, <씨네21>, <코스모폴리탄> 등 4개 매체를 거치며 지금껏 만난 사람들의 면면 중에 가장 열렬히 질투했던 구석을 파고든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https://www.hani.co.kr/arti/SERIES/3196?h=s)에서 사랑스러운 질투로 파고든 인사이트를 만나보세요!
이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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