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작가 은유에게 종교는 ‘당신’이다

장일호 기자 2026. 2. 17. 07:49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르포 작가 은유(사진)의 ‘먹고사는 일’ 연재가 끝났다. 1년6개월간 총 17명을 만났다. 전업 작가로 먹고사는 드문 행운을 은유는 어떻게 세상에 돌려주며 살지 궁리한다.
ⓒ시사IN 신선영

‘먹다’와 ‘살다’는 붙어 다니는 말이다. 먹어야 살고, 살기 위해 먹는다. 그 과정 전부를 ‘일’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2024년 8월부터 르포 작가 은유(54)의 인터뷰 ‘먹고사는 일’이 〈시사IN〉에 연재됐다. 일하는 사람이 덜 죽고 덜 다치는 세상을 위한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1년6개월 동안 총 17명을 만났다. 일하는 사람,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 자리에 세웠다. 인터뷰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미리 준비해 같이 만들거나 나눠 먹었다. 김밥·떡볶이·컵라면·막걸리 등 평범하고도 익숙한 음식에서 “삶이 묻어나왔다”. 식사 한 그릇을 통해 고단하고도 위대한 타인의 생을 잠시나마 엿보았다. 전체 녹취록 분량은 200자 원고지 2000장이 넘는다. 인터뷰이 한 명당 최소 100장 이상 된다. 은유에게 인터뷰는 “사람을 살게 하는 말을 모으고 나누는 일(〈아무튼, 인터뷰〉)”이다. 무성한 말의 숲을 보물찾기하듯 즐겁게 헤매며 글로 꿰어냈다.

글을 밥으로 바꿔 먹은 세월이 어느덧 20년을 넘었다. 프리랜서 집필 노동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 ‘몸’이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는 게 나이 드는 거 같아요.” 밤늦게 커피를 마시고도 쉽게 잠들던 날들이 은유에게도 있었다. 원고 쓴다고 밤을 새워도 하루쯤 쉬고 나면 거뜬했던 때도 있다. 모두 과거의 일이다. “도미노처럼 계속 일상이 무너져” 그런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하게 일할 수 없었다. 손가락이 저려 정형외과에 가면 ‘쓰지 말라’는 말이 돌아왔다. 물리치료를 받아도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 두 개를 직업병으로 얻었다. 여느 노동자가 그러하듯 아픈 몸으로 산다. “의사들 맨날 하는 말이 쓰지 말래. 안 쓰면 나는 누가 먹여?(웃음)” 동시에 늙어가는 몸에 저항하지 않는 법을 궁리한다. 크고 작게 아프면서 몸도 ‘소모품’임을 알게 됐다.

빵과 커피는 은유 작가가 아침밥 대신 자주 먹는 음식이다. ⓒ시사IN 조남진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커피를 내린다. 지난밤에 정말 마시고 싶었지만 꾹 참았던 그 커피다. 매일 아침 보상처럼 커피 쿠폰이 주어지는 기분이다. 커피의 가장 좋은 짝꿍은 빵이다. 지난밤 좋아하는 빵집에 들러 미리 사둔 빵을 예쁜 접시에 옮겨 담으면 아침 준비 끝. “아침에 빵이랑 커피 먹으려고 눈떠요. ‘빵 먹어야지’ 생각하면서 일어나요.” 어디선가 ‘다정함은 탄수화물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처음 봤을 때 그야말로 ‘빵’ 터졌다. 배가 고프면 쉽게 삶을 비관하곤 하던 자신이 떠올라서다. 아침밥을 차리는 대신 빵을 먹을 수 있게 된 건 길고도 긴 육아 러닝타임이 끝나고부터였다. 여섯 살 터울 아이 둘을 성인으로 기르는 데 26년이 필요했다. 매일 오전 6시에 시작되던 하루를 오전 8시에 시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굉장히 감격했다”.

마흔한 살의 데뷔, 그리고 책 14권

예전에는 직접 제빵을 하기도 했다. 서울 목동에 살면서 전업으로 육아를 하던 때다. 남과 나를 자꾸만 비교하며 ‘유행’에 휩쓸리곤 했다. 파운드케이크도 만들고 쿠키도 구웠다. “아기 키우는 데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정말 예뻤고, 그만큼 어쩔 줄 몰랐고요. 나한테 아이의 너무 많은 것이 걸려 있더라고요.” 그때 아이는 “내 앞에 주어진 너무 중요한 과제”였다. 먹는 기쁨만큼이나 먹이는 기쁨이 은유를 살게 했다. 그렇게 몸에 밴 습관이 지금은 은유를 살린다. 바쁘고 힘들어도 식사는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밥은 꼭 챙겨 먹는다.

식사와 수면 중에 골라야 하면 밥이다. “아무래도 엄마로서, 돌봄 양육자로 산 시간이 길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내 감정이나 기분과 상관없이 가사 노동을 해야 하니까. 그게 저한테는 어렵지 않아요. 타인을 먹이면서 나도 먹는 거죠. 기분이 좋아도 슬퍼도 그냥 밥은 밥이지.” 아이 둘을 키우는 동안 엄마도 함께 자랐다. 가사 노동은 고단한 만큼이나 귀한 삶의 기술을 남겼다. 먹고 싶은 음식을 뚝딱 해낼 수 있는 기술, ‘나는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다’라는 자부심이 부록처럼 따라다녔다. 시장 한 바퀴 휘 돌다 보면 마음이 바빠진다. 제철인 섬초를 겨울 지나기 전에 먹기 위해서, 번거롭지만 직접 손질하면 더 맛있는 우엉의 흙맛을 알아서 장바구니가 이내 두둑해진다.

글쓰기는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배우자가 실수로 거액의 채무를 떠안았다. 집을 팔아도 돈을 갚을 수 없었다. 둘째가 세 살 무렵이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전공’을 살려 은행에 이런저런 지원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답을 얻지 못했다. 30대 중반의 엄마를 반기는 곳이 없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집 안의 천사’로만 살 수 없게 되면서 ‘좋은 엄마’에 대한 기준도 재조정해야 했던 시기다.

몰락의 경험은 배움을 남겼다. “무언가를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게 되거든요.” 생활고 앞에서 은유는 역설적으로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했던 증권회사에서 알게 된 노동조합 선배의 주선으로 2005년 프리랜서 사보 기자로 일해서 처음 번 원고료는 20만원. 최소한의 생계비만 벌더라도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욕구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됐다. 필명을 만들어 이름을 돌려 쓰면서 일을 받았다. 생계와 돌봄을 병행하며 삶을 대하는 맷집을 키웠다. 사보에는 나름의 미덕이 있었다. 개성 있는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다양한 사람을 만나도 쓸 수 있는 형식과 매수가 정해져 있었다. 은유는 그 경험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글쓰기를 ‘훈련’했던 시간으로 추억한다. 그 덕분에 다른 글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해볼 수 있었다.

2012년 첫 책 〈올드걸의 시집〉이 나왔을 때가 마흔한 살이었다. 마흔 살에 〈나목〉으로 데뷔한 박완서가 소설을 썼다면 은유는 40대 내내 르포르타주를 썼다. 단독 저서로만 어느덧 책 열네 권을 낸 작가가 됐다.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를 다룬 〈폭력과 존엄 사이〉(2016), 출판업을 둘러싼 다양한 직업을 인터뷰한 〈출판하는 마음〉(2018), 현장실습생 김동준의 죽음을 추적한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2019), 미등록 이주아동을 다룬 〈있지만 없는 아이들〉(2021), 〈한겨레〉 연재물 ‘은유의 연결’을 통해 만난 인터뷰를 모은 〈크게 그린 사람〉(2022), 한국 문학 번역가의 일하는 마음을 살펴본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2023)까지 여섯 권이 인터뷰를 기반으로 쓰였다. 지난해 출간된 〈아무튼, 인터뷰〉는 은유의 인터뷰 노하우를 집약한 책이다. 만난 사람과 써온 글을 배신하지 않으며 살기 위해 애쓴다. “나는 그냥 은유가 아니라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쓴 은유, 〈있지만 없는 아이들〉을 쓴 은유인 거예요. 내 책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돼야 할 책임이 저한테 있더라고요. 뱉어놓은 말과 글이 다 내 업보야(웃음).”

은유의 작업물을 설명하는 또 다른 큰 주제는 글쓰기다. 〈글쓰기의 최전선〉(2015), 〈쓰기의 말들〉(2016),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2023)는 글쓰기 수업을 하며 익힌 것을 나누기 위해 쓴 책들이다. 그 덕분에 글쓰기와 관련된 강연이 은유의 생계를 힘껏 부축한다. 어느 날은 강원도 산골에, 어느 날은 남해 바닷가 앞에 노트북을 펼쳐놓는다. 낯선 이들과 함께 글을 쓰며 삶을 섞는다. 독자를 만나는 일은 생계에도 도움이 되지만, 무엇보다 “르포 작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내가 모르는 삶의 자리에 가보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독서와 비슷한 희열이 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 즐겁다. 편견이 깨진 자리마다 호기심과 연민이 자랐다. SNS를 폐쇄할까 마음먹다가도, 그 창을 통해 연결되는 세상을 포기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몸이 가지 못할 때는 손가락이라도 움직인다. ‘홍보 요정’ 은유의 SNS는 시민사회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의 게시판 역할도 겸한다.

은유 작가가 오른팔에 새긴 레터링 타투. ‘비포 선셋’은 글쓰기의 시작을 떠올리게 하는 문구다. ⓒ시사IN 신선영

그동안 은유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안 하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시간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태될까 무서웠다. 전업 작가로 살 수 있는 드문 행운을 누리면서 불안을 다스리는 법도 익혔다. 태생이 그리 걱정이 많은 편이 아니긴 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단 책이 많아지는 것은 자랑스럽기보다 두렵다. “사람들은 작가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안 쓰는 날이 더 많아요. 일할 때 제가 가장 많이 할애하는 시간은 읽는 시간이에요. 그다음으로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이른바 ‘현장’을 가요. 뭘 쓰려는 목적으로 가지 않고, 시민으로 가요. 인풋이 없는데 아웃풋이 계속 나오는 건 제 무덤 파는 거죠. 한 말 또 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요. 삶이 먼저고 쓰기는 그다음이에요. 내 삶을 살아야 글도 나와요. ‘산다’가 앞에 있어야 해요.”

일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받으려 한다. 일정을 정할 때 갑작스러운 장례식 참석처럼 ‘사람 노릇’ 할 수 있는 빈 공간을 확보하려고 한다. 일정과 업무량, 컨디션을 살펴 일을 ‘해치우듯 하지 않을 수 있는가’도 신중하게 따져본다. 두 번째 기준은 ‘배움’이다. 다소 힘들어 보여도 배움이 있는 자리라 생각되면 기꺼이 나아간다. 글쓰기를 평생의 ‘업’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글쓰기가 내 삶에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쓰고 싶지 않아요. 독자를 존중하고 싶지, 독자에게 아부하고 싶지 않거든요.” 제 존재를 작가의 자리에 묶어두기보다는 유연하게 흐르며 살고 싶다.

“인터뷰는 끝이 없다”

글쓰기는 자신의 삶에 중요한 일이지만 타인의 삶에 앞서는 일은 아니다. 은유는 작가야말로 땅에 발을 제대로 딛고 서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얼어죽을 창작의 고통. 그놈의 ‘글 감옥’(웃음). 저는 작가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너무 고평가돼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노동이라고 힘들고 진이 안 빠지겠어요. 그런데 보통의 평범한 노동자는 자기 일을 언어화하지 않죠.” 은유에게는 모든 노동이 어느 정도 힘들고, 어느 정도 귀하다. 특히 저평가된 노동의 세계를 더 많이, 더 부지런히 세상에 옮기려 한다. 글쓰기라는 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노동자들을 인터뷰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올 때면 과격한 움직임을 자제하고 살살 걸었는데, 몸에 차곡차곡 담아온 이야기가 헝클어질까 봐 그랬다(〈아무튼, 인터뷰〉).”

그런 마음가짐으로 1년6개월간 〈시사IN〉 지면에 ‘먹고사는 일’ 연재를 이어왔다. “동료 프리랜서가 ‘뭐 하다 안 되면 급식실 가지’ 이러더라고요. 근데 우리가 급식 노동자도 만났잖아요. 급식 노동은 아무나 하는 줄 아나(웃음). 쉬워 보이는 일은 있어도 쉬운 직업은 없다, 타인의 노동을 함부로 얕잡아 보지 마라… 연재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세상에 전달하고 싶었어요.”

지난해 12월29일 은유는 접이식 미용 베드 위에 누워 있었다. 쉰네 살이 되도록 아직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들떠 있었다. 타투이스트 황도를 인터뷰한 뒤 타투를 결심했다. 원고 마감 후 ‘첫 타투’를 무엇으로 새길지 고심했다. 비포 선셋(before sunset). 프리랜서 작가로 처음 일할 때 이메일과 블로그 주소로 썼던 문구다. 글쓰기의 출발과 첫 마음을 기억하기에 맞춤했다. 동명의 영화도 정말 좋아한다. “영화 〈비포 선셋〉 너무 좋지 않아요? 내내 말하고 걷고 노래하는 주인공들의 ‘말길’이 끊기지 않는 영화잖아요. 사람, 대화, 음악… 삶에서 필요한 게 꼭 맞게 있는 영화예요.”

타투를 하기 전 타투이스트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선셋은 좋아하는 풍경. 해 질 녘의 쓸쓸함은 영원한 문학적 공간이다. 자기 안의 이야기를 피 토하듯 쏟아내는 붉음을 보노라면 어김없이 슬퍼진다. 어이없이 사라지는 해처럼 나도 삶에서 죽음으로 순식간에 넘어갈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걸 도로 다 내놓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비포는 삶의 유한성에 관한 상기다.” 걱정과 달리 타투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 걸려 완성된 레터링 타투를 보고 새로운 용기를 냈다. 다음에는 반려 고양이 ‘무지’의 얼굴을 새겨넣고 싶다.

인터뷰는 이렇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일 앞에 은유를 자주 데려다 놓았다. 타투이스트 황도를 만나 타투를 하고, 전태일의료센터 등에 기부한 유튜버 김가인과 가수 안예은을 만나고 나서는 인세 일부를 기부했다. “제가 지식이 많거나 학문적 토양이 있거나 했던 게 아니잖아요. 먹고살 수 있었던 건 누군가가 나에게 이야기해줬기 때문이고, 그걸로 글도 쓰고 책도 냈기 때문에 제가 버는 돈이나 받는 사랑이 다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걸 세상에 어떻게 흘려보낼지가 저한테는 중요한 과제예요.”

‘먹고사는 일’ 연재는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의 마중물을 만들고자 시작했다. 1월20일 임상혁 녹색병원장이 은유 작가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시사IN 장일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사람을 알게 되어서 은유는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래서 “인터뷰는 끝이 없다”. ‘먹고사는 일’을 연재하는 동안에도 작지만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은유는 일상에서 만나는 노동자들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청소 노동자가, 식당 노동자가, 배달 라이더가, 버스 기사가 내가 인터뷰한 사람을 통해 ‘아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그 얼굴들에서 은유는 우리 시대의 전태일을 몇 번이고 다시 만났다.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한다는 게 좀 쑥스럽잖아요. 그래서 예전에는 속으로만 인사했거든요? 그런데 인터뷰하고 나니까 일상에서 만나는 분들을 다 내가 만난 사람과 겹쳐 보게 되는 거죠. 결국 타인이 저를 살게 하는 것 같아요. 저를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제가 종교는 없지만, 인터뷰를 종교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우리의 일상을 떠받치는 일을 하는 분들을 투명인간 취급하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요즘 인사 잘하는 어른이 됐어요.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고맙습니다!’(웃음)”


[캠페인] 전태일의료센터, 여러분의 이름으로 채워주세요

아픈 몸 너머 사회를 치료하는 이 병원의 이름은 ‘전태일’입니다.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들여다보면 구조적인 안전문제가 꼭 숨겨져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덜 아프고 덜 다칠 수 있을지를 연구하고 사회와 함께 행동하는 병원을 만듭니다. 전태일의료센터는 2027년 건립을 목표로 시민들의 건립 기금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참여 문의: taeilhospital.org).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읽기근육을 키우는 가장 좋은 습관 [시사IN 구독]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