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째론 너무 비싼데…잔으로 파는 ‘글래스 와인’ 맛집

천호성 기자 2026. 2. 1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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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의 천병까기]
피노누아 와인 한잔과 아위버섯 구이. 천호성 기자

얼마전 프랑스 신문 르피가로에 ‘크리스마스 만찬을 망치지 않으려면 피해야 할 6가지 실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연말연시 홈파티에서 와인을 낼 때의 팁이었다. 귀한 와인을 대접한다고 너무 다양한 산지를 섞거나, 검증되지 않은 낯선 와인을 내지 말라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놀라운 대목은 와인을 너무 ‘적게’ 준비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기사는 “손님이 열두명인데 와인을 열여덟병 꺼내려다 열다섯병만 꺼낸”다면 “심각한 착각”, 심지어 “인색함”이라고 꼬집었다. “잔치의 진짜 호사는 값비싼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라, 누구도 목마르지 않게 충분히 마시는 것”이라고 기사는 강조했다.

문제는 이만큼 마시면 취한다는 거다. 열두명이 750ml 들이 와인 열여덟병을 마시면, 한사람 당 소주 두병 반(참이슬 후레쉬 기준) 정도 알코올을 들이키게 된다. 내가 아는 프랑스인과 한국인들 주량은 대개 여기에 못미친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사를 닫았다.

한병이 많다면 잔 단위 주문을

와인이 식사를 즐겁게 하려면 꼭 이만큼의 ‘양’이 필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마시면(내 경우 1병을 넘기면) 취기 탓에 저녁자리 뒷부분의 와인 맛은 기억에서 사라진다. 이튿날엔 묵직한 숙취가 전날 새해 모임의 즐거운 추억을 망칠 수 있다. 세명 이상이 모이는 홈파티에선 각자 한병씩 준비해오면 알맞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만큼이면 다채로운 와인을 기분좋게 마실 수 있다.

식당에서라면 ‘글래스(잔) 와인’ 리스트를 눈여겨보길 권한다. 요즘은 식당가의 와인 저변이 넓어져 와인바나 양식 다이닝은 물론, 한식·바베큐 식당에서도 잔 단위로 파는 와인을 찾을 수 있다. 식당들은 자기 메뉴에 잘 어울리면서도, 대중적으로 널리 찾는 와인을 글래스 와인으로 올려놓으려 한다. 와인을 사다가 집에서 마실 때처럼 음식과의 ‘페어링’에 고민을 덜해도 되는 셈이다.

특히 보유한 와인 리스트가 방대하고 실력 있는 소믈리에가 있는 업장이라면, 잔 와인들을 추천받아 마시는 즐거움이 한병 통째로 주문하는 것 못지 않을 수 있다. 병째로 시키기에 너무 비싼 와인을 잔으로 청해 ‘접근 가능한’ 가격에 마셔보는 행운은 덤이다.

지난 연말 ‘기가스’에서 잔으로 주문해 시음한 ‘라 리오하 알타 그란 레제르바 890’ 2010 빈티지(가운데)와 ‘라 리오하 알타 그란 레제르바 904’ 2015 빈티지(오른쪽). 천호성 기자

한잔으로 만난 플래그십 와인

지중해식 요리를 선보이는 식당 ‘기가스’(서울 중구 퇴계로)에서의 지난 연말 저녁이 그랬다. 두툼한 와인 메뉴판 첫장엔 10종류 넘는 글래스 와인과 하프 보틀(375ml) 목록이 올라와있다.

제철 채소들이 주인공인 코스 전반부에선, 은은한 흰꽃과 허브향이 피는 프랑스 알자르 리즐링 하프 보틀을 마셨다. 그뒤 익힌 고기 차례를 앞두고 레드와인 추천을 부탁하니, 이곳의 조민영 소믈리에는 예상치 못한 와인을 꺼내왔다.

스페인 리오하 지역의 명생산자 ‘라 리오하 알타’(La Rioja Alta)의 플래그십인 ‘라 리오하 알타 그란 레제르바(Gran Reserva) 890’ 2010 빈티지, 그것도 매그넘(1500ml) 보틀이었다. 작황이 뛰어난 해에만 나오는 라인인 데다, 6년의 숙성 기간을 거친 뒤에 출시되는지라 국내 와인샵 매대에서 보기엔 쉽지 않다. 그해 매그넘은 4200병 정도만 생산됐다.

이런 고가 와인을 잔 단위로 내놓는 업장은 흔치 않다. 와인이 산화되기 전에 한병을 모두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코르크를 따지 않고 특수 바늘로 마개를 관통해 와인을 따르는 ‘코라뱅’(coravin) 장치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한번 서빙한 와인이 영원히 보관되는 건 아니다. 병으로 팔았다면 수백만원을 호가했을 와인을 잔으로 제공하다니. 와인을 보관하고 다루는 노하우와 주문량에 대한 업장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스페인의 토착 품종 템프라니요가 베이스인 이 와인은 검붉은 과실과 토바코의 스모키함을 향에서부터 강렬히 피웠다. 여기에 편백나무 같은 시원한 내음이 코에서부터 술을 넘긴 뒤까지 길게 이어졌다. 입안을 꽉 채우는 풀바디의 질감, 그러면서도 와인이 텁텁하지 않도록 또렷히 드러나는 산미가 발군.

제피를 곁들여 기름짐을 잡고 육향을 강조한 쇠고기 스테이크와 와인의 합이 특히 좋았다. 소믈리에가 왜 자신있게 권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도멘 도미니크 기용 마르사네 앙 로티에’ 2022 빈티지. 천호성 기자

식사를 빛내는 피노 한잔

업장들의 글래스 와인 리스트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한해 생산량이 천병 남짓한 부르고뉴 와인을 만나기도 한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채식 식당 ‘레귬’(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선 메인 요리인 아위버섯 구이에 곁들일 피노누아 한잔을 고심 중이었다.

부조(Vougeot) 마을의 강건한 프르미에 크뤼 등급(1급)을 고르려는데, 레귬의 성시우 오너셰프는 이보다 저렴한 마르사네 마을의 와인을 추천했다. ‘도멘 도미니크 기용 마르사네 앙 로티에’(Domaine Dominique Guillon Marsannay ‘En Leautiers’) 2022 빈티지였다.

한 마을에 수ha 땅을 가진 기업형 생산자들과 달리, 소규모 양조장이 말로 밭을 갈며 빚어내는 와인이었다. 많아야 한해 700병 정도 생산되고 이중 100병만 한국에 온단다. 레귬의 음식과 와인이 잘 어우러져 이 식당이 30병을 받았다고. 술의 특징 뿐 아니라 생산자 이야기까지 풀어주는 셰프의 설명에 끌려 고민 없이 이 와인을 받아들었다.

결과는 대만족. 잔에 따르자마자 장미향이 그윽해 향수병에 코를 댄 기분이었다. 라즈베리와 히비스커스가 얹혔고, 입속에선 붉은 과즙미 가운데 사향이 스쳐 우아함을 더했다. 산도는 부르고뉴의 피노누아 중에선 높지 않았는데, 버섯의 풍성한 육즙과 맞추기엔 이편이 자연스러웠다.

버섯을 베어 물고 와인을 들이킬 때의 어우러짐을 떠올리면 지금도 침이 고일 정도다. 여기서가 아니었다면 못 만났을 와인을 즐겼다는 생각에 식사는 더욱 만족스러웠다.

‘비냐 보스코니아 리오하 레제르바’ 2008 빈티지. 천호성 기자

정석을 뛰어넘는 변주

식당의 안목을 제대로 즐기려면 요리마다 한잔의 와인을 곁들이는 페어링 코스를 고르는 것도 방법이다. 내로라하는 소믈리에가 있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지난 가을 ‘빈호’(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선 리오하의 템프라니요가 전복 요리와 함께 나왔다. 탄닌의 떫은맛이 강하고, 때로는 열감이 감지될 정도로 진득한 와인인 템프라니요는 대개 해산물과는 붙이지 않는 선택지다. ‘해산물엔 화이트, 육류엔 레드’가 여전히 대다수 업장의 정석이다.

하지만 이날 나온 ‘비냐 보스코니아 리오하 레제르바’(Viña Bosconia Rioja Reserva) 2008 빈티지는 탄닌이 부드럽게 녹아, 떫은맛의 자리를 과실의 은근한 달콤함이 메웠다. 이 맛이 신선한 해산물 살의 단맛과 자연스레 이어졌다. 와인의 보들한 질감 역시 야들하게 익힌 전복과 한몸인듯 어울렸다. 김진호 오너 소믈리에는 리오하 중에서 탄닌이 과하지 않고, 특유의 보드라운 단맛을 잘 보여주는 와인을 골랐다고 했다. 세심하면서도 과감한 페어링이었다.

글머리에 언급한 르피가로 기사는 ‘연말연시 파티에서 실험적인 페어링은 금물’이라 했다. 안전한 조합으로 여러 사람 입맛을 만족시키라는 취지다. 하지만 전문가의 안목이 깃든 와인 차림이라면 예외다. 정석보다 맛난 변칙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잔 페어링의 매력이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천호성의 천병까기

먹고 마시기를 사랑하는 이라면 한번 쯤 눈독 들였을 ‘와인’의 세계. 7년 간 1000병 넘는 와인을 연 천호성 기자가 와인의 매력을 풀어낸다. 품종·산지 같은 기초 지식부터 와인을 더욱 맛있게 즐길 비기까지, 매번 한 병의 시음기를 곁들여 소개한다. 독자를 와인 세계에 푹 빠트리는 게 연재의 최종 목표.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네이버, 다음 등 포털뉴스 페이지에서는 하이퍼링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주소창에 아래 링크를 복사해 붙여넣어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 마셔도 맛있을 가성비 와인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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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병 마셔본 기자의 와인 ‘쉽게’ 고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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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사이로 대서양의 짠 바람…“이게 테루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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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 ‘그레잇 빈티지’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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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사표 내고 떠난 보르도 유학, 인생을 바꾼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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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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