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집에 든 칼?···‘민생 담합과의 전쟁’ 정부가 꺼낸 가격재결정 명령은

정부가 ‘민생 담합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20년간 사실상 사문화 상태였던 ‘가격 재결정 명령’을 언급하면서 담합에 대한 강경 대응 기조를 분명히 했다. 정부가 담합을 벌인 기업을 처벌하는 것 뿐 아니라 가격을 내릴 수 있도록 강제하겠다는 것이다. 적용 요건이 까다로워 실현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정부의 정책 의지를 보여줘 사실상 가격을 낮추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가공식품 물가 ‘쑥’···과징금 내면 끝?

이 대통령은 지난 5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독과점 상황을 악용해 국민에게 고물가를 강요하는 이런 현장의 문제는 국가 공권력을 총동원해 반드시 시정하기를 바란다”면서 “가격조정명령 제도를 잘 활용해야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가격조정명령제도는 공정위의 ‘가격 재결정 명령’을 뜻한다. 담합이 적발된 기업들에게 ‘정상 가격’을 산정해 가격을 다시 매기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정부가 가격을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업계가 재결정한 가격과 산정 근거를 공정위에 보고하게 하므로 사실상 가격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이 대통령의 발언에는 현재 물가 오름세가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닌 담합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식품업체들은 정부 감시가 느슨해진 탄핵 정국 때 가격을 무더기로 인상했다. 2024년 11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6개월 동안 소비자물가를 구성하는 가공식품 73개 품목 중 52개 품목(71.2%)의 가격이 올랐다. 지난 1월 기준 가공식품 물가 상승률은 2.8%로 전체 물가상승률(2.0%)을 크게 웃돌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담합을 적발해 처벌해도 정작 가격은 잘 내려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정위의 시정명령도 ‘앞으로 담합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라 가격을 내리는 데는 별 효과가 없다. 실제로 지난 2012년 공정위가 라면 담합을 적발해 제재했으나 이후 라면 가격이 내려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가격 재결정 명령은 가격을 담합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적용 요건 까다롭지만···“칼집에 든 칼” 효과

가격 재결정명령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 우선 적용 요건이 다소 까다롭다. 명백한 합의가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그 담합의 효과가 최종 심의일까지 종료되지 않아야 한다. 통상 담합은 적발 시 중단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용 사례는 드물 수 밖에 없다. 공정위가 지난 12일 발표한 제당 3사의 설탕 담합 사건에서도 같은 이유로 재결정 명령이 적용되지 않았다.
‘정상 가격’을 산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기업으로서는 담합이 아니라 원재료·인건비 상승 등으로 가격이 오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데, 여기서 ‘담합으로 인한 물가 상승분’을 정확히 따지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공정위가 시장 가격에 개입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실제로 과거 정부가 나서 상품 가격을 조정했다가 무산된 바 있다. 교육부가 2014년 가격 조정 명령을 통해 학교 교과서 가격을 최대 44% 낮추자 교과서 출판사들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법원은 ‘교육부가 조정 가격 산정방법·산출 내역을 충분히 밝히지 않았다’며 교육부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단순히 가격이 높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가격이 부당하다’는 것을 정부가 입증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러 제약 탓에 가격 재결정 명령은 2005년 도입 이후 이듬해 밀가루 담합 사건 때 한 번 적용된 후 20년간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였다.
다만 실제로 재결정 명령까지 이어지지 않더라도 강경 대응 기조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가격 인상을 늦출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대통령 담합 경고 발언 이후 식품업계는 잇따라 가격을 내렸다. 최근 담합이 적발된 CJ제일제당·삼양은 설탕·밀가루 가격을 최대 6% 인하했다. 2023년에도 정부에서 라면 가격이 과도하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내놓자 농심·삼양 등이 라면 가격을 내린 바 있다.
한 공정거래법 전문가는 “칼집에 들어 있는 칼처럼 ‘가격 인하를 위해 이런 방법도 쓸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가격 인상을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세훈 기자 ksh371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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