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개 경로당이 ‘활기 가득’ 응답했다…시공간 뛰어넘는 ‘작은 기적’
(17) 대전 유성구 스마트 경로당

겉모습은 어느 동네나 하나쯤 있을 법한 평범한 경로당으로 보였다. 하지만 대전 유성구의 경로당 문을 열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어르신들이 커다란 TV 화면 속 강사와 실시간으로 대화하며 트로트 리듬에 맞춰 체조하고, ‘건강체크’라고 쓰인 키오스크 앞에 서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혈압과 맥박을 점검한다. 단순히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TV를 시청하던 과거의 경로당이 ICT(정보통신기술)를 입고 어르신들의 삶을 활기차게 바꾸는 복합 복지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TV·키오스크·태블릿…경로당이 달라져
120개 경로당이 동시에 참여할 수 있는 비결은 실시간 화상 시스템이다. 유성구노인복지관 내에 있는 전용 스튜디오에서 전문 강사가 수업을 진행하면, 각 경로당에 설치된 75인치 대형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송출된다. 참여 방식은 줌(Zoom)과 유사한 쌍방향 화상 연결 시스템이다. 다만 120개 경로당이 한꺼번에 접속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서버 부하를 방지하기 위해, 경로당을 60개씩 두 그룹으로 나누어 1교시와 2교시로 수업을 진행한다. 어르신들은 화면을 통해 강사와 대화하며 노래교실(월), 건강체조(수), 특별 프로그램(금) 등 주 3회 정기 수업에 참여한다.

경로당끼리 유니폼 맞춰 입고 응원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분위가 완전히 달라졌다.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어르신들의 ‘생활 리듬’이다. 예전에는 별 할 일 없이 세월에 떠밀려가는 삶이었다면, 이제는 월·수·금 정해진 프로그램 시간에 맞춰 스스로 하루를 계획하고 경로당으로 향한다. “예전엔 경로당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이젠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체조도 하고, 노래교실도 하고 정해진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어르신들이 그 시간을 기다려요.” 김 회장의 말이다.
대형 TV 화면을 다 같이 보며 리듬을 맞춰 움직이니까, 혼자 하기 힘들었던 체조도 즐거워졌다. “서로 붙잡아주고, 음악에 맞춰 움직이니까 더 재미있는 거 같아요. 유튜브로 혼자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거든요.”

실시간 수업 시청을 넘어 120개 경로당이 하나로 묶이는 순간은 분기별로 열리는 ‘경로당 대항 특별 프로그램’이다. 실시간 화상 시스템을 활용해 퀴즈 대회, 노래자랑, 윷놀이 대회 등을 벌이는데, 강사가 특정 경로당 이름을 부르며 “너무 잘하신다”고 칭찬하면 어르신들의 반응이 뜨거워진다. 다른 경로당에 지지 않으려고 경로당별로 단체 유니폼을 맞춰 입고 응원전을 펼치는 등 강한 결속력을 보여준다.
은퇴 공무원·교사가 ‘스마트 매니저’로

보행기 없이 일어선 88살 어르신
이영순 매니저는 “바쁜 농사일 중에도 매주 새롭게 제공되는 화상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경로당을 찾으실 정도로 어르신들의 생활 중심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어르신들의 신체 건강에서 나타났다. 2년 동안 스마트 매니저와 함께 꾸준히 근력 운동 프로그램을 따라 한 결과, 보행기 없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어르신이 스스로 서서 운동을 따라 하게 된 ‘작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매니저는 “앞으로의 과제는 아직 경로당에 나오지 않는 동네 어르신들을 어떻게 이 활기찬 현장으로 모셔오는 것”이라며, “필요하다면 가정방문이라도 해서 이 유익한 프로그램에 꼭 참여하실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카드 분실 신고까지…경로당의 만능 해결사
성 매니저는 어르신들의 고민을 해결하는 ‘만능 해결사’로도 통한다. 어느 장날,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려 당황해하던 어르신 두 분이 장대경로당을 찾았던 일이 있었다. 카드 분실 신고하는 법을 몰라 당황한 어르신들에게 경로당의 다른 회원이 “우리 매니저에게 부탁하면 다 해결된다”며 소개했다. 성 매니저는 즉시 은행 전화번호를 찾아 카드 분실 신고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어르신은 그제야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경로당에 오니 다 해결됐다”며 안도했다. 그는 “우리나라 모든 경로당에 스마트 매니저가 상주한다면 어르신들의 삶이 더욱 안정되고 질적으로 향상될 것”이라고 했다.

뚝심이 만든 ‘노인복지의 혁명’
그가 찾은 해답은 ‘정보화’였다. 시대의 흐름인 정보로부터 소외될수록 노년의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류 관장은 2015년부터 외부에서 헌 컴퓨터를 얻어다 보급하며 정보화 사업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던 중 화상 기술을 보유한 벤처 회사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업체가 추진하던 독거 어르신 1:1 관리 모델을 경로당 중심의 ‘1 대 다수(多)’ 시스템으로 전환하자는 아이디어를 류 관장이 냈다.
현장에서 5년간 묵묵히 검증하며 다듬어온 이 모델은 코로나19라는 비대면 상황을 맞이하며 그 진가를 발휘했다. 유성구의 사례는 과기정통부의 공모 사업으로 뽑혔고, 스마트 경로당은 전국으로 확산하는 성공 모델이 됐다. 지금까지 40여곳의 지방자치단체가 유성구노인복지관을 방문해 노하우를 배워갔다. 류 관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전국의 스마트 경로당이 네트워크를 이뤄 각 지역의 특성과 이야기를 교류하는 장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60대가 80대를 돌보는 미래의 경로당
류 관장은 “우리 사회는 이제 60대가 80대를 돌보는 시대로 진입할 수밖에 없는 시기”라며, “단순한 보조를 넘어 노인 일자리 사업을 통해 이러한 사회적 구조 자체를 변화시켜 가는 것이 궁극적인 지향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초고령 사회에서는 복지가 어르신들을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를 해야 하는데, 어르신들이 집에서 가장 가깝고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거점이 바로 경로당”이라며, “젊은 노인 인력을 활용해 고령 노인을 촘촘히 보살피는 이 모델이 전국적인 노인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혁신적인 답안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유성구 스마트 경로당은 어르신들이 단순히 쉬는 곳을 넘어 배우고 웃으며 세상과 연결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한때는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졌던 디지털이, 이제는 어르신들의 일상을 더 넓은 세상과 이어주는 든든한 문이 되어주고 있다.
# ‘우리 동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지방정부, 시민사회, 그리고 주민이 함께 참여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현장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지역 구성원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변화와 혁신을 이끌고, 더 나은 공동체로 성장해가는 생생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마을기업, 사회적경제, 청년·여성·노인 등 다양한 주체가 환경·문화·교육·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힘을 모으는 협력 프로젝트, 그리고 지역의 고유한 자원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우리 동네의 특별한 현장, 꼭 알리고 싶은 공동체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동네 이름, 추천 이유, 간단한 소개(사람·단체·프로젝트 등)를 ejung@hani.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코너에서 더 많은 ‘우리 동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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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가 들리는 동네’…청년정책 바꾼 하동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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