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89%, 명절 스트레스 있다” 한국만 겪는 거 아니었어요?[이윤정 기자의 소소월드]

명절 때마다 느끼는 스트레스는 한국만의 현상일까. 해외로 눈을 돌리면, 가족이 모이는 날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감정은 놀랄 만큼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해외 매체들은 명절을 앞두고 가족 모임에서 긴장을 낮추는 전략을 소개하곤 한다. 만국 공통 ‘명절 증후군’의 표정과, 이를 견뎌내는 방식들을 들여다봤다.
세계 각국에서 실시된 설문조사는 해외의 명절 스트레스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보여준다. 2023년 미국심리학회(APA) 조사에 따르면, 가족과 함께 보내는 명절 연휴(추수감사절·크리스마스) 동안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미국 성인은 89%에 달했다. 재정 부담과 가족 갈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지난해 미국 정신건강 기업 라이프스탠스헬스 조사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확인됐다. 응답자의 75%는 명절 모임이 ‘즐거움’보다 ‘의무’에 가깝다고 답했는데, Z세대(1997~2012년 출생자)에서는 이 비율이 89%로 더 높았다. 미국에서도 젊은 세대일수록 명절 모임을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부담스러운 일정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 셈이다.
대서양 건너 영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24년 영국 리서치 그룹 민텔 조사에서는 16~24세 응답자의 58%가 가족과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스트레스로 느낀다고 답해, 전체 평균(24%)을 크게 웃돌았다. 영국의 관계·가족 상담 지원 단체 릴레이트가 실시한 설문에서도 영국 성인의 절반 이상(52%)이 명절 기간 가족 간 언쟁이 벌어진다고 응답했다. 이유로는 생활비 문제, 선물 비용, 가족 행사에 따른 지출 증가 등이 지목됐다.

이웃 나라 중국의 명절 사정도 비슷하다. 중국의 설인 춘절은 전통적으로 온 가족이 모이는 최대 명절이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스트레스의 상징으로도 자리 잡았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 조사에 따르면, 중국 청년의 85% 이상이 춘절 기간 가족으로부터 결혼과 관련한 압박을 느낀다고 답했다. 평소 교류가 적던 친척들을 명절에 한꺼번에 마주치면서, 결혼·연애·직업을 둘러싼 사적인 질문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중국 청년들은 춘절 귀성을 부담스러워하는 ‘춘지에후이지아야리(春节回家压力·춘절 귀가 압박)’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처럼 가족 갈등이 두드러지는 명절 증후군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그 배경에는 가족을 ‘자주, 오래’ 만나지 않는 연말연시 문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여론조사 기관 인테이지에 따르면, 지난해 연말연시 기간 귀성이나 여행 계획이 없다고 답한 비율은 전체 응답자의 60.2%에 달했다. 또 다른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7%가 연말연시를 ‘집에서 조용히 보내겠다’고 답해, 대규모 가족 모임 자체를 피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다만 명절 갈등은 덜하지만, 그 자리를 외로움과 고립감이 차지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 청년 지원 비영리단체 D×P가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서, 청년 응답자의 32.8%가 연말연시를 앞두고 ‘불안하거나 걱정된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가족과의 단절, 경제적 여유 부족, 혼자 보내는 연휴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주로 꼽혔다.
그렇다면 가족과의 만남을 완전히 피하지 않으면서도 명절 스트레스를 줄일 방법은 없을까. 해외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적당한 거리 두기’와 ‘기대치 조절’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미국 AP통신은 명절 가족 모임에서 긴장을 낮추는 전략으로 ‘그레이 록’ 기법을 소개했다. ‘회색 바위처럼’ 갈등을 부르는 주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감정 반응을 최소화하고 무미건조하게 대응하는 심리적 기술이다. 정치 성향이나 개인사 질문이 나올 경우 짧고 중립적인 답변으로 대화를 더 키우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도 크리스마스 가족 모임을 앞두고 전문가 조언을 전하며 비슷한 접근법을 제시했다. 영국상담심리치료협회(BACP) 치료사 케이티 로즈는 “가족과 며칠 함께 보내야 할 경우를 대비해 혼자만의 휴식 시간을 일정에 미리 포함시키고, 긴장이 높아질 때는 잠시 자리를 벗어나는 식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관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심리 전문가 조지나 스터머는 ‘화목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한다’는 기대 자체가 스트레스를 키운다며, 완벽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압박을 내려놓는 것이 갈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가디언은 이러한 전략이 갈등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 회피가 아니라, 자기 감정을 보호하면서 가족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현실적인 심리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관영매체 신화통신과 CCTV도 매년 춘절을 앞두고 청년층의 명절 부담을 다루며, 심리 상담 전문가들의 조언을 소개해왔다. 결혼·연애 관련 질문에 대비해 미리 짧고 중립적인 답변을 준비하거나, 대화를 일·취미·건강 같은 안전한 주제로 자연스럽게 전환하는 전략이 소개되기도 했다. 후난성 제2인민병원 임상심리과 부주임의사 치징은 “매년 되풀이되는 친척들의 사적인 질문에 모두 답하려 하기보다, ‘전에도 이야기했듯이’라고 대화의 한계를 정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응법”이라고 조언했다.
세계 곳곳의 명절 풍경이 보여주듯 명절 증후군은 개인의 성격 문제도, 특정 문화의 산물도 아니다. 갈등은 가족이 이상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너무 중요한 관계이기 때문에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란 무엇이든 말해야 하는 사이가 아니라,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관계다. 미국 가족치료학 창시자 머레이 보웬은 이렇게 말했다. “가족 문제는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가족 간 적절한 거리가 없어서 생긴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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