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대신 위고비...늘어나는 재고에 주류업체 비명
“10여 년 만에 가장 높은 31조”
장기 호황 예상해 생산 시설 확대
인플레·소비 위축으로 음주 기피
건강 우선 문화에 비만치료제도 영향

위스키·코냑·데킬라 등 프리미엄 증류주 수요가 역사적 수준으로 위축되면서 글로벌 주류업체들이 대규모 재고 부담에 직면했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건강을 중시하는 생활 문화가 확산하는 가운데 비만 치료제 보급으로 체중 관리 중심의 라이프스타일이 자리 잡으면서 음주를 줄이는 경향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업체들은 공장 가동을 중단하거나 가격 인하에 나서는 등 재고 소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디아지오, 페르노리카, 캄파리, 브라운포맨, 레미 쿠앵트로 등 상장 주류업체 5곳의 숙성 재고 규모는 2025년 기준 220억 달러(약 31조 원)로 집계된다. 이는 10여 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가장 심각한 곳은 프랑스 코냑 업체 레미 쿠앵트로다. 이 회사의 숙성 재고자산은 18억 유로(약 3조 원)에 달해 연 매출의 두 배이자 시가총액과 맞먹는 규모로 불어났다. 영국 주류 업체 디아지오 역시 매출 대비 숙성 재고 비율이 2022년 34%에서 2025년 43%로 급증했다. 투자은행(IB) 번스타인의 트레버 스털링 애널리스트는 “재고 증가 규모가 전례 없는 수준”이라며 “현재 재고는 금융위기 이후 축적됐던 수준을 넘어섰다”고 평가했다.
재고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것은 기업들의 수요 예측 실패가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업체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나타났던 음주 호황이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생산 능력을 공격적으로 확충했다. 그러나 이후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소비 위축이 겹치며 수요가 급감했고 업계 전반이 직격탄을 맞았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번 침체를 단순한 경기 순환의 측면에서 보기 어렵다는 시각도 많다.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수요 감소의 배경이라는 분석이다. 전반적인 건강 중시 문화가 확산되면서 알코올 소비 자체가 줄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위고비, 오젬픽 등 비만 치료제의 인기가 음주 욕구를 억제하면서 주류 수요를 근본적으로 위축시키고 있다는 평가 또한 나온다.

수요 변동은 대응하기 어려운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장기간 숙성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수요를 수년 전에 예측해 계획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코냑의 경우 원액을 최소 2년에서 길게는 12년 이상 숙성시켜야 하지만 향후 수요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FT는 “데킬라 시장도 마찬가지”라며 “지난 10년간 조지 클루니, 켄달 제너 등 유명 인사를 앞세워 신규 브랜드가 등장했지만 생산 설비가 본격 가동되자마자 수요가 꺾였다”고 진단했다.
재고 누적에 따른 기업 재무 부담도 가중되고 있다. 디아지오의 순차입금 대비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 배율은 현재 3.4배로 목표치(3배 미만)를 크게 웃돈다. 페르노리카 역시 3.3배로 과거 평균 2.5~2.9배를 넘어서고 있다. 이는 이익 대비 부채 부담을 보여주는 지표로, 빚 상환 여력이 줄었음을 뜻한다.
재고 압박은 가격 인하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 프랑크 마릴리 레미 쿠앵트로 최고경영자(CEO)는 “공급 과잉 상황에서 가격 하락은 불가피한 수순”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의 헤네시 코냑은 미국에서 병당 최대 45달러에 판매됐지만 현재는 35달러 수준까지 낮아졌다.
기업들은 재고를 줄이기 위해 생산 중단이라는 고육책까지 동원하고 있다. 일본 주류업체 산토리는 미국 켄터키 소재 짐빔 버번 증류소를 1년 이상 폐쇄했다. 디아지오도 텍사스·테네시 생산 시설 가동을 올여름까지 중단한다는 방침이다.
일부에서는 생산 축소가 장기적으로 수급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에드워드 먼디 제프리스 애널리스트는 “5~10년 뒤 특정 브랜드나 카테고리 수요가 다시 살아날 경우 오히려 공급 부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침체기에 재고를 과도하게 줄이면 향후 시장 회복기에 대응하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이완기 기자 kinge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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