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 대통령은 어떻게 그 와인을 맞혔을까?

천호성 기자 2026. 2. 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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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의 천병까기]
2017년 2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세미용·소비뇽블랑 품종으로 빚은 보르도 화이트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하는 모습. 유튜브 채널 Vincent POUSSON 갈무리

와인에 갓 맛을 들일 무렵에 유튜브에서 인상 깊게 본 와인 콘텐츠가 있다.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 프랑스 와인 전문지 ‘테르 드 뱅’과 인터뷰를 하며 ‘와인 맞히기’ 시음을 하는 영상이었다. 때는 2017년 2월로 마크롱이 아직 대선 후보인 시절이었고, 40살인 그는 지금보다 머리숱이 많고 젊어 보였다.

그가 받은 첫잔은 보르도 가론강 우안(북쪽) 산지인 앙트르 되(두) 메르(Entre-deux-Mers)의 ‘샤토 로뒤크’(Château Lauduc) 2015 빈티지. 보르도의 화이트는 한국에선 부르고뉴 샤르도네 등에 비해 낯선 편인데, 마크롱은 향을 쓱 맡더니 답을 질렀다. “앙트르 되 메르네요.” 마크롱은 맛을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쩝쩝 다셨고, “레몬 향이 강하면서 산도가 높고 진흙향도 난다”는 평을 남겼다. 생산지를 맞혔으니 정답.

그다음 출제된 프랑스 남부의 코토 덱상 프로방스(Coteaux d'Aix en Provence) ‘샤토 비뉴로르’(Château Vignelaure) 2015 빈티지 로제 역시 마크롱은 쉽게 맞혔다.

오감으로 다가가는 와인의 정체

마지막으로 나온 보르도 좌안(남쪽) 페삭-레오냥(Pessac-Léognan)의 명 와인 ‘샤토 파프 클레망’(Château Pape Clément) 2005 빈티지를 추론하는 대목은 특히나 압권이었다. 향을 맡자마자 마크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가죽과 숲 바닥의 향이 느껴진다며 이렇게 답을 골랐다. “포이약, 아니면 비슷한 지역이네요. 코는 거짓말 안해요.” 10초 정도 맛까지 느끼고선 “아주 맘에 든다. 저는 보르도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생테스테프 느낌은 아니고…”라며 마음껏 음미했다.

놀라웠던 점은 그가 와인이 보르도 좌안에서 난 걸 맞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포이약·생테스테프 등 보르도의 기라성 같은 세부 산지들의 특징까지 일일이 알고서, 향과 맛으로 정답이 될만한 마을을 추려가는 모습이었다. 품종을 가리기도 어렵던 나는 ‘저 경지에 닿으려면 와인을 몇병이나 마셔야 하나’ 경탄하며 몇번이고 영상을 돌려봤다.

샤토 파프 클레망 페삭-레오냥 루즈 2004 빈티지. 천호성 기자

이렇게 와인 라벨을 가린 채 와인의 정체를 맞추는 시음을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이라 한다. 시음자는 시각·후각·미각을 총동원해 와인의 품종, 생산지, 나이 심지어 생산자를 추론한다. 우선 잔에 따른 와인의 빛깔을 보고 품종·나이를 짐작한 뒤, 향을 맡아 품종이나 생산지의 테루아(풍토)에서 비롯되는 특질들을 구분한다. 맛에서의 산도·당도·알코올도수·탄닌·질감도 모두 힌트가 된다.

마크롱이 본보기가 되었는지, 나는 와인에 재미를 붙인 직후부터 이런 시음에 자주 도전했다. 함께 와인 즐기는 친구들과 퇴근 후 한병씩 들고 모여 맞히기를 하는가 하면, 다이닝 레스토랑을 오래 운영했던 나의 와인 스승께 블라인드 출제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물론 정답의 타율은 예나 지금이나 높지 않다. 간혹 빈티지까지 맞히는 날이면 친구들이 ‘작두 탔다’며 축하해줄 정도.

못맞춰도 재밌는 이유

그럼에도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재밌는 건 와인이 안기는 감각을 허투루 흘려 보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식사 자리에서 와인은 대개 훌륭한 조력자 역할이다. 맛있는 요리와 함께해 풍미를 살려준다거나, 연말의 샴페인 또는 피노누아 한잔처럼 즐거운 분위기를 띄운다. 식탁의 대화를 잠시 멎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맛이 아닌 이상, 와인의 인상은 쉬이 잊혀질 때가 많다.

반면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선 와인이 온전히 ‘주인공’이 된다. 시음자는 와인의 정체성을 찾아갈 유일한 단서인 색·향·맛에 정신을 모으고, 한 생산지와 다른 생산지를 가를 미세한 차이를 기억해둔다. 와인으로선 제 매력을 남김 없이 뽐낼 기회인 셈이다.

같이 마시는 이들이 촉을 세워 집어낸 향들을 듣는 것도 묘미다. 내가 평소 주목하지 않고 넘겼던 와인의 특징들을 다른 사람의 표현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그날의 와인은 물론 다음번 만날 와인까지 더 맛있게 즐기게 해준다.

2023년 3월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받았던 샤토 몬텔레나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1988 빈티지. 나는 보르도 생테스테프의 카베르네 소비뇽이라고 답했다. 천호성 기자

즐거움은 이것만이 아니다. 라벨을 가리는 순간 와인은 ‘계급장’을 떼고 내 앞에 나타난다. 와인의 세계엔 등급이 존재한다. 이탈리아의 DOCG처럼 정부가 인정하는 품질 기준이 있고, 보르도 좌안의 그랑크뤼처럼 19세기의 고급 와인 인증이 오늘날까지 시장 가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개인적인 취향 역시 와인의 급을 가르고, 또 굳힌다. 와인 취미 초기에 큰 감명을 준 생산지의 와인은 대개 오래도록 셀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같은 가격이어도 내가 맛있게 마셔본 종류의 와인을 더 높게 치는 것이다. 어느 지역이나 품종에 대한 애호가 더해지면 쏠림은 더욱 심해진다. 나의 경우 와인을 접하고 처음 3년 동안 산 와인 10병 중 9병은 보르도 좌안의 레드나 부르고뉴 코트 도르(Côte-d'Or)의 피노누아였을 정도다. 이런 편식을 줄여준 게 블라인드 테이스팅이었다.

모르고 마시니 더 맛있던 와인

지난 연말에 스승이 블라인드로 맛보여준 레드와인 한병이 그랬다. 선홍빛 루비색의 와인은 잔에 따르자마자 신선한 딸기내음을 피웠다. 달달하면서 고소해 어릴 때 먹던 ‘후레쉬베리’ 과자의 딸기크림 냄새 같기도 했다. 입안에선 포도 줄기를 씹을 때의 씁쓸함이 스치는 걸로 보아 탄닌이 없는 품종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라즈베리처럼 새초롬한 주스와 풍선껌을 연상케 하는 달콤함이 모나지 않게 어우러졌다. 후미에선 앞서의 베리 내음이 긴 잔상으로 이어졌다.

내가 부른 답은 부르고뉴 코트드뉘(Côte de Nuits) 지역의 피노누아였다. 사실 내가 알던 부르고뉴 피노누아보다는 이 와인의 과실미가 발랄했다. 피노누아라기엔 시종 이어지던 풍선껌내음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만큼 우아한 산미를 내면서 구조감을 갖춘 와인은 부르고뉴 피노 뿐’이라는 손쉬운 편견에 나는 피노누아로 답을 골랐다.

메종 르루아 보졸레 빌라주 2019 빈티지(맨 왼쪽). 2024년 12월 분당 ‘필리오’에서 시음. 천호성 기자

하지만 정답은 부르고뉴 남쪽의 생산지인 보졸레(Beaujolais)에서 난 보졸레 빌라주(Beaujolais Villages) 2019 빈티지. 생산자는 부르고뉴 지역의 손꼽는 명생산자 ‘메종 르루아’(Maison Leroy)였다. 보졸레는 가메(Gamay)라는 토착 적포도 품종을 생산하는 지역이다. 짧은 숙성만 거쳐 매년 11월 출시하는 햇빈티지 와인 ‘보졸레 누보’가 한국에서 유명하다. 이 술로 와인을 처음 접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다만 비교적 저가인 보졸레 누보의 유명세 탓인지, 혹은 숙성 잠재력이 짧다는 점 때문인지, 보졸레는 부르고뉴 다른 지역 레드와인(피노누아)보다 인기가 덜한 게 사실이다. 내게도 그랬다. 가메는 큰 복합미를 기대 않고 풋풋한 과일맛으로만 마시는, 덜 진지한 와인이란 인상이 있었다. 모르공·물랭 아방처럼 보졸레 안에서도 품질이 높다는 마을들의 와인이 보여도 여간해선 장바구니 뒷순위로 밀렸다.

그런데 막상 라벨을 가리고 마신 보졸레는, 내가 그리 좋아하는 피노누아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맛있는 와인이었다. 과실 위주로 직선적인 술도 내 입에 잘 맞는다는 사실 역시 이날 알았다. 그뒤론 와인샵이나 식당(특히 내추럴 와인을 전문으로 다루는 와인바)에 눈길 가는 보졸레가 있으면 주저 않고 고른다. 눈에 들어오는 와인의 세계가 넓어진 셈이다.

그러니 블라인드 테이스팅의 묘미는 답 맞히기만이 아니다. 라벨을 가리면 보이는 와인의 매력이 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천호성의 천병까기

먹고 마시기를 사랑하는 이라면 한번 쯤 눈독 들였을 ‘와인’의 세계. 7년 간 1000병 넘는 와인을 연 천호성 기자가 와인의 매력을 풀어낸다. 품종·산지 같은 기초 지식부터 와인을 더욱 맛있게 즐길 비기까지, 매번 한 병의 시음기를 곁들여 소개한다. 독자를 와인 세계에 푹 빠트리는 게 연재의 최종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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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 ‘그레잇 빈티지’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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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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