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이 자꾸 ‘아무 말 대잔치’를 해요

한겨레 2026. 2. 1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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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 사전]
말비빔(word salad)
클립아트코리아
“우리가 언어를 버리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혀끝에 무슨 언어든 떠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혀 끝에서 맴도는 이름> 파스칼 키냐르
37살 지안씨는 스타트업 회사의 프로젝트 매니저다. 중요한 신규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요즘 들어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주말이면 사내 동갑내기 커플인 연인 은수씨와 시간을 보내며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지만, 정작 데이트를 하고 나면 피곤할 때가 더 많다.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며칠 전이었다. 삼십 분 넘게 기다렸지만, 은수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안씨는 전화를 걸었다. “은수씨, 어디야? 오고 있어? 약속 시간이 삼십 분 지났는데….”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왠지 퉁명스러웠다.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아니, 늦어도 연락이 없길래 그러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지안씨는 걱정이 되었다. “내가 요즘 얼마나 스트레스받는지 몰라서 그래?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 은수씨는 ‘어디냐’는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날 선 질문으로 되받았다.

“미안해, 화낸 건 아닌데 그렇게 들렸나 보다. 내가 데리러 갈게, 지금 어디야?” 라고 지안씨가 물었다.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전에 야근한다고 약속 깬 적 있지? 나는 다 이해했잖아. 너한테 맞추느라 얼마나 힘든 줄 알아?”라고 은수씨가 말했다. ‘그때는 회사 일이었고 분명 미안하다 여러 번 말했는데….’ 지안씨는 은수씨가 어디쯤 왔는지 묻고 싶었지만, 대화는 이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알았어, 만나서 이야기하자. 지금 어디야?” 라고 묻는 지안씨에게 “이런 식으로 자꾸 몰아붙이면 대화하기 싫어. 네가 좀 차분해지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라고 말하며 은수씨는 전화를 끊었다.

지안씨는 갑자기 멍해졌다. 은수씨는 결국 오고 있는지, 오고 있다면 어디쯤 오는지, 혹은 안 오겠다는 건지 정확히 말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지안씨는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을까?’ 죄책감과 혼란에 빠졌다. 대화 내내 반복된 ‘은수의 서운함’이 아무리 되짚어봐도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과 감정을 쏟아내는 은수씨의 이러한 의사소통방식은 ‘말비빔(word salad)’라 불리는 언어 패턴과 일치하는데, 대화의 핵심에서 벗어나 과잉된 감정과 말이 뒤섞인 특징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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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처럼 뒤섞인 ‘말비빔’

조현병 환자에 대해 연구했던 정신분석가 로널드 랭은 <분열된 자기(The Divided Self)>(1960)에서 파편화된 말들의 나열인 ‘말비빔’을 사용하는 사람과 대화하면, 듣는 사람도 ‘말비빔’을 하게 될 수 있고 상대의 ‘말비빔’에 끌려들어 가지 않도록 자신의 언어로 바꾸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말했다. 로널드 랭에게 ‘말비빔’은 병리적 발화로서의 의미보다 극도로 분열된 존재론적 불안과 해체감을 드러내는 표현에 가까웠다. ‘말비빔(word salad)’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말들이 뒤섞여 문장의 의미가 무너진’ 상태로,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마치 샐러드처럼 질서없이 섞여 있는 언어 패턴이다.

원래는 조현증의 비자발적으로 분열된 언어를 설명하는 표현이었지만, 최근 들어 ‘말비빔’은 정신의학에서의 임상적 맥락을 벗어나, 의미 없는 정치적 수사나 모호한 말하기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트렌디한 표현이 되었다. 뇌 손상 혹은 조현병처럼 신경학적이거나 정신증적 원인에 의한 ‘말비빔’과 달리,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비빔’은 핵심을 벗어나 모호하고 장황해지는 대화를 가리킨다. 쉽게 말해 ‘아무 말 대잔치’와 같은 표현이라 이해하면 된다. 2024년 미국 대선 국면에서 보수 진영과 온라인 커뮤니티가 카말라 해리스의 발언이 두서없고 핵심을 비껴간다며 ‘말비빔’이라 희화하며 조롱한 것처럼 말이다. 트럼프 역시 CBS의 ‘60minutes’ 인터뷰가 제대로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해리스의 ‘말비빔’을 감추기 위해 왜곡 편집되었다며 강하게 비난했고 법적 대응 가능성을 언급하며 논란을 키웠다.

‘말비빔’이라는 표현은 SNS상에서 대화를 피하거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상대가 묻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도 자주 사용된다. 생성형 AI가 만든 글이나 Chat GPT와의 대화는 그럴 듯하지만 핵심 질문이나 맥락을 건드리지 못해 ‘AI 말비빔’이라고도 불린다. 제임스 카메론은 AI가 만든 대본은 ‘말비빔’에 불과하며 인간을 대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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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에 쓰이는 화법

다양한 ‘말비빔’ 중에서 자주 언급되는 나르시시스트의 ‘말비빔’은 가스라이팅을 설명할 때 주로 거론된다. 임상적 의미와 별개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나르시시스트’란 용어는 과도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지배적이며,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타인을 심리적으로 조종하거나 착취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르시시스트나 가스라이팅이란 용어로 나와 생각과 입장이 다른 타인을 섣불리 병리화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지만, 나에게 해롭거나 소진을 일으키는 관계 패턴을 알아차리는 것은 유용하다.

자기애적 성격 구조를 가진 나르시시스트의 ‘말비빔’은 얼핏 들으면 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지만, 듣는 사람을 혼란스러움에 빠뜨린다. 상관없는 문장이 나열되고,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의 ‘말비빔’은 목적이 명확하다. 관계를 통제하기 위해 핵심 질문에 답하지 않고 애매하지만 그럴듯한 말로 대화를 비껴가려는 것이다. 물론 속사정이야 더 들여다봐야겠지만, 대화 자체만 들었을 때 지안씨가 경험한 은수씨의 ‘말비빔’은 이 패턴과 유사하다. ‘왜 늦었는지’라는 단순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비판이라고 여겨 갑작스러운 감정 과잉과 더불어 맥락 없는 과거의 에피소드가 소환되기 때문이다.

임상심리학자 라마니 더바술라 박사는 가스라이팅을 위해 사용되는 ‘말비빔’은 듣는 사람이 ‘이게 무슨 말이지?’ 라는 의문을 갖게 하고 결국 자신을 이상한 사람이라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200만명이 넘는 팔로워를 가진 라마니 박사의 유튜브 채널은 나르시시스트와 가스라이팅 콘텐츠로 유명한데, 나르시시스트의 ‘말비빔’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애초부터 의미 없는 말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헛된 노력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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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가 사용하는 말비빔 패턴

1. 논리적으로 관련 없는 단어와 주제가 튀어나온다. “어제 왜 안 왔어?”라는 단순한 질문에, “요즘 왜 이렇게 예민해?”, “넌 그때 더 심했잖아”처럼 맥락과 무관한 지적이나 과거의 사건이 갑작스럽게 소환된다.

2. 과장된 감정 표현이 대화를 압도한다. 분노, 서운함, 억울함으로 ‘내가 너무했나?’라는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막상 다루어야 할 문제는 사라진 채 대화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3. 과도한 일반화와 극단적인 표현이 반복된다. ‘항상’, ‘절대’, ‘맨날’ 같은 비논리적 표현으로 한두 번의 행동을 영원한 것처럼 단정 짓고 부정적인 라벨이 붙는다.

4. 책임 전가로 대화의 흐름이 바뀐다.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시작했잖아”, “네가 그렇게 안 했으면”처럼 대화의 중심이 상대 탓으로 바뀌고 처음의 대화 주제는 더 이상 다루어지지 않는다.

5. 대화의 목적이 ‘내가 맞고 네가 틀리다’라는 싸우는 승패 구조가 된다. 문제의 해결이나 관계 회복보다 혼란을 유발하는 전쟁이 된다.

6. 원래의 질문은 결국 답을 얻지 못한다. 복잡해 보이는 단어와 추상적이고 번지르르한 표현, 모호하고 애매한 말 속에서 대화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은 채 끝이 난다.

‘말비빔’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나르시시스트의 ‘말비빔’을 경험하면 ‘내가 잘못한 걸까?’, ‘혹시 내가 잘못 이해를 못 한 건가?’라는 자기의심을 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느낌은 혼란과 좌절을 낳고 정서적으로 소진되게 만든다. 나르시시스트의 ‘말비빔’은 수치심을 느끼거나 공격받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촉발되는 방어 반응이다. 회피와 방어, 통제가 작동하면서 대화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다.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할수록 대화는 복잡하게 꼬이기 때문에 생산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필요한 태도는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내가 알고 싶은 핵심만 짧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내 질문에 대답해줘”, “나는 지금 OO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처럼 간단하지만 분명한 문장으로 핵심을 잊지 않고 되짚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감정과 경계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상대방의 흐름에 휘말리지 않도록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대화가 계속해서 엉키거나 맴도는 느낌이 들고, 나를 설명하거나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소모적으로 느껴진다면 대화를 멈추어야 할 신호다. 상호작용을 최소화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대화를 마친 뒤에도 혼란스러움이 가시지 않고 껄끄럽게 느껴진다면, 신뢰할 만한 제3자에게 그 대화를 공유해본다. 내가 보지 못했던 감정의 흐름과 사실관계를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해줄 수 있고, 이는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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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볼 질문들

1. 상대가 갑작스럽게 감정을 폭발시키는 바람에 막상 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적이 있나요?

2. 유독 대화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 때 나는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나요?

3. 상대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과 논리를 억지로 이해하느라 애쓴 경험이 있나요?
오늘의 용어: 말비빔(word salad)

조현병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와해되고 파편화된 말이 일관성 없이 계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정신의학 용어로 비논리적인 언어의 혼란을 의미하지만, 최근에는 핵심 없는 말하기를 비롯해 자기애적 성격 구조를 가진 나르시시스트의 언어 습관을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논점을 흐리는 말하기, 갑작스러운 과거의 소환, 과잉된 감정과 말의 홍수, 모호하고 결론 없는 말의 반복 등을 특징으로 한다. 관계적인 맥락에서의 말비빔은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책임을 회피하며 자신을 의심하게 하는 조작적 대화 방식을 가리킨다.
▶노은정의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은?

개인이 느끼는 일상의 정서와 감정에는 무의식적인 모순과 억압된 기억, 문화적 압박과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뒤섞여 있습니다. 때문에 잘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마음을 돌보는 일은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호하고 낯선 마음에 하나씩 이름을 붙여보는 노은정의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https://www.hani.co.kr/arti/SERIES/3316?h=s)을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에서 만나보세요!
노은정 두번째마음 심리상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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