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은 어른의 시작…짜릿함보단 운명의 가혹감 느껴 [김윤지의 애살맞아 생긴 일]

김윤지 하동군 근무 2026. 2. 1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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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과 어른 사이, 스른

29, 30. 우리말로 숫자를 읽어보세요. 잠깐, 제대로 다시 읽어보세요. '서'물아홉, '스'른이 아닙니다. 사실 경남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읽어도 마찬가지일 테니 이쯤에서 적당히 넘어가겠습니다. 뜬금없이 숫자 타령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주 뒤쯤이면 제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기 때문이죠. 만 나이로는 여전히 스물아홉이라 우길 수 있겠지만, 제 생애에서 앞자리가 세 번째로 바뀌는 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홉 살에서 열 살이 되었을 때를 기억합니다. 한 자리 숫자에서 두 자리 숫자로 진입한다는 건, 이제 나만 빼고 놀던 동네 언니들과 함께 어울릴 당당한 자격이 생긴 것 같아 뿌듯했죠. 열아홉에서 스물이 될 때도 신이 나 있었습니다. 저는 이른바 '빠른 년생'입니다. 비록 1월 1일 자정에 술집 앞에 줄을 서지는 못했고, <킹스맨>을 영화관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2015년과 16년 2년에 걸쳐 아주 천천히, 스며들 듯이 스물이 된 셈이지요. 그때의 앞자리 변화는 모두 짜릿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뿐이었습니다.
내 나이 서른을 기념하고자 떠난 영국 여행에서 본 풍경. /김윤지

하지만, 고작 앞자리 숫자가 '1'이 더해졌을 뿐인데 이제는 짜릿함은커녕 묵직한 돌덩이를 얹은 듯한 무게감만 느껴집니다. 모두가 예찬하는 청춘의 범위는 보통 십대에서 이십대 사이잖아요. 이제 저는 아무것도 안 해도 칭찬받던 존재에서, 어떻게든 안간힘을 써야 핀잔이나 면하는 '어른'의 세계로 강제 진입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가끔 "빚 묵고는 살아도 나이 묵고는 못 산다"고 하셨는데, 이제 그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더는 세상이 나를 '깍두기'로 보아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어른은 자신의 몫을 온전히 다해야 합니다. 사회 자체가 내 존재에 더는 무미건조한 찬미를 보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니어도 개의치 않아야 하는 존재죠. 무엇보다 서늘한 건 이제 누구도 나에게 진심 어린 지적을 하거나 첨삭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내 실수는 교정되어야 할 성장판이 아니라 그저 내 평판을 깎아 먹는 결과값으로 남을 뿐입니다. 잘못 가고 있을 때조차 예의라는 가면 뒤에서 아무도 내 팔을 붙잡아 세워주지 않는 무관심. 사실은 누가 내 삶에 '별로예요'라고 댓글이라도 달까 봐 전전긍긍하는 이 소심함이 제 서른의 본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국 여행 중 우연히 본 30살 생일카드. /김윤지

왜 하필 서른이 어른의 시작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우리말 자음 순서를 보면 'ㅅ' 다음이 바로 'ㅇ'이잖아요. 'ㅅ'으로 시작하는 서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ㅇ'으로 시작하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사회가 정해놓은 순서 아닐까 싶습니다. 자음 단 한 칸만 넘어가면 바로 어른이 되어버리는 이 언어적 운명이 조금은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좀 아껴주기로 했습니다. 26개에 6만 원이 넘는 비타민을 사서 먹습니다. 입안에 탁 털어 넣으면 뻑뻑한 가루가 부드럽게 넘어가질 못하고 편도 부근에서 오렌지 탄산 맛으로 저를 괴롭히죠. 비싼 갈색병 화장품도 씁니다. 귀한 용액이 한 방울이라도 흘러내릴까 봐 찔끔찔끔 얼굴에 바르는 제 모습이 가끔은 궁상맞아 보이지만, 이건 노화가 두려워서 부리는 객기가 아닙니다. 앞으로 긴 세월 무거워지는 숫자를 짊어지고 가야 할 나 자신에게 보내는 아주 작고 세속적인 위로일 뿐입니다.
노화에 대비해 마련한 화장품과 영양제. /김윤지

어쩌면 경남 사람들이 서른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스물아홉의 '스'를 가져와 '스른'이라고 고집 부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른의 문턱에서도 마음 한 자락은 여전히 스무 살 언저리에 붙잡아두고 싶은 무의식적인 저항 같은 거죠. 하지만, 제가 평생 이곳에만 숨어 살 수는 없습니다. 뮤지컬을 보러 서울에 가기도 하고 이탈리아를 여행 가기도 하니, 언젠가는 또박또박 서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때마다 입술을 양옆으로 편 상태에서 혀를 입천장에 가깝게 두는 '스'가 아닌, 입을 벌리고 혀를 내리는 '서' 발음을 의식적으로 연습하겠지요. '진짜 어른'인 척 연기를 해야 하는 그 순간들이 벌써 조금은 피곤하게 다가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아직 어른이 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이곳의 넉넉한 품 뒤에 숨어 제 혀가 편한 발음대로 머물고 싶습니다. '서터레스'를 받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어른이 되기 전인 2월 25일까지는 '스른'의 나를 더 너그럽게 봐줘야겠습니다. 그리고 진짜 서른이 시작되는 26일부터는 지금보다 더 많은 영양제와 화장품을 사야 하겠지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ㅇ'의 세계로 끌려가야 한다면, 그만큼 더 비싼 비용을 치르며 스스로 수선할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요. 고약한 냄새의 영양제마저도 꿀떡 삼키며 내일의 카드 값을 계산하는 그런 뻔한 어른이 되면서 말입니다.

/김윤지 하동군 근무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