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30. 우리말로 숫자를 읽어보세요. 잠깐, 제대로 다시 읽어보세요. '서'물아홉, '스'른이 아닙니다. 사실 경남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읽어도 마찬가지일 테니 이쯤에서 적당히 넘어가겠습니다. 뜬금없이 숫자 타령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주 뒤쯤이면 제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기 때문이죠. 만 나이로는 여전히 스물아홉이라 우길 수 있겠지만, 제 생애에서 앞자리가 세 번째로 바뀌는 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홉 살에서 열 살이 되었을 때를 기억합니다. 한 자리 숫자에서 두 자리 숫자로 진입한다는 건, 이제 나만 빼고 놀던 동네 언니들과 함께 어울릴 당당한 자격이 생긴 것 같아 뿌듯했죠. 열아홉에서 스물이 될 때도 신이 나 있었습니다. 저는 이른바 '빠른 년생'입니다. 비록 1월 1일 자정에 술집 앞에 줄을 서지는 못했고, <킹스맨>을 영화관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2015년과 16년 2년에 걸쳐 아주 천천히, 스며들 듯이 스물이 된 셈이지요. 그때의 앞자리 변화는 모두 짜릿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뿐이었습니다.
내 나이 서른을 기념하고자 떠난 영국 여행에서 본 풍경. /김윤지
하지만, 고작 앞자리 숫자가 '1'이 더해졌을 뿐인데 이제는 짜릿함은커녕 묵직한 돌덩이를 얹은 듯한 무게감만 느껴집니다. 모두가 예찬하는 청춘의 범위는 보통 십대에서 이십대 사이잖아요. 이제 저는 아무것도 안 해도 칭찬받던 존재에서, 어떻게든 안간힘을 써야 핀잔이나 면하는 '어른'의 세계로 강제 진입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가끔 "빚 묵고는 살아도 나이 묵고는 못 산다"고 하셨는데, 이제 그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더는 세상이 나를 '깍두기'로 보아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어른은 자신의 몫을 온전히 다해야 합니다. 사회 자체가 내 존재에 더는 무미건조한 찬미를 보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니어도 개의치 않아야 하는 존재죠. 무엇보다 서늘한 건 이제 누구도 나에게 진심 어린 지적을 하거나 첨삭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내 실수는 교정되어야 할 성장판이 아니라 그저 내 평판을 깎아 먹는 결과값으로 남을 뿐입니다. 잘못 가고 있을 때조차 예의라는 가면 뒤에서 아무도 내 팔을 붙잡아 세워주지 않는 무관심. 사실은 누가 내 삶에 '별로예요'라고 댓글이라도 달까 봐 전전긍긍하는 이 소심함이 제 서른의 본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국 여행 중 우연히 본 30살 생일카드. /김윤지
왜 하필 서른이 어른의 시작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우리말 자음 순서를 보면 'ㅅ' 다음이 바로 'ㅇ'이잖아요. 'ㅅ'으로 시작하는 서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ㅇ'으로 시작하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사회가 정해놓은 순서 아닐까 싶습니다. 자음 단 한 칸만 넘어가면 바로 어른이 되어버리는 이 언어적 운명이 조금은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좀 아껴주기로 했습니다. 26개에 6만 원이 넘는 비타민을 사서 먹습니다. 입안에 탁 털어 넣으면 뻑뻑한 가루가 부드럽게 넘어가질 못하고 편도 부근에서 오렌지 탄산 맛으로 저를 괴롭히죠. 비싼 갈색병 화장품도 씁니다. 귀한 용액이 한 방울이라도 흘러내릴까 봐 찔끔찔끔 얼굴에 바르는 제 모습이 가끔은 궁상맞아 보이지만, 이건 노화가 두려워서 부리는 객기가 아닙니다. 앞으로 긴 세월 무거워지는 숫자를 짊어지고 가야 할 나 자신에게 보내는 아주 작고 세속적인 위로일 뿐입니다.
노화에 대비해 마련한 화장품과 영양제. /김윤지
어쩌면 경남 사람들이 서른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스물아홉의 '스'를 가져와 '스른'이라고 고집 부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른의 문턱에서도 마음 한 자락은 여전히 스무 살 언저리에 붙잡아두고 싶은 무의식적인 저항 같은 거죠. 하지만, 제가 평생 이곳에만 숨어 살 수는 없습니다. 뮤지컬을 보러 서울에 가기도 하고 이탈리아를 여행 가기도 하니, 언젠가는 또박또박 서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때마다 입술을 양옆으로 편 상태에서 혀를 입천장에 가깝게 두는 '스'가 아닌, 입을 벌리고 혀를 내리는 '서' 발음을 의식적으로 연습하겠지요. '진짜 어른'인 척 연기를 해야 하는 그 순간들이 벌써 조금은 피곤하게 다가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아직 어른이 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이곳의 넉넉한 품 뒤에 숨어 제 혀가 편한 발음대로 머물고 싶습니다. '서터레스'를 받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어른이 되기 전인 2월 25일까지는 '스른'의 나를 더 너그럽게 봐줘야겠습니다. 그리고 진짜 서른이 시작되는 26일부터는 지금보다 더 많은 영양제와 화장품을 사야 하겠지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ㅇ'의 세계로 끌려가야 한다면, 그만큼 더 비싼 비용을 치르며 스스로 수선할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요. 고약한 냄새의 영양제마저도 꿀떡 삼키며 내일의 카드 값을 계산하는 그런 뻔한 어른이 되면서 말입니다.
/김윤지 하동군 근무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