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위에 올라타 야외노출 감행한 그녀…100년 명품 초콜릿 브랜드로 환생했다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6. 2. 1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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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141][프로토타입-15] 고디바

[프로토타입] 세상의 모든 새로운 것들은 프로토타입을 거쳐 완성됩니다. 시제품 또는 초기모델을 뜻하는 ‘프로토타입’ 시리즈는 모든 것의 탄생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김없이 돌아온 발렌타인, 초콜릿을 담다
올해도 어김없이 발렌타인데이가 돌아왔다. 말로는 다 못하는 마음을, 달콤한 초콜릿에 담아 전달하는 날. 마케팅수단이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특수를 누리기 위한 수많은 초콜릿 브랜드와 상점들이 이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올해 창업 100주년이 된 벨기에의 고급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 역시 이처럼 선택을 기다리는 수많은 브랜드 중 하나다. 이젠 벨기에의 명품 초콜릿으로 불리는 고디바지만 100년 전 그 시작은 벨기에 브뤼셀의 한 가정집 부엌 한켠에 놓인 초라한 조리대였다.
고디바 로고
초콜릿을 납품하던 이름없던 가족, 장인정신을 새기다
1926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피에르 드랍스는 가정 작업장에서 ‘프랄린’을 만들어 벨기에 백화점 사르마 등 백화점과 소매점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공장도, 브랜드도, 화려한 매장도 없었다. 가족이 함께 만든 작은 속 채운 초콜릿이 전부였다. 프랄린은 속재료를 채운 한입 초콜릿이다. 자신의 브랜드가 따로 있지 않았지만 장인정신을 갖고 일에 임했다.
여러 프랄린으로 구성된 고디바 초콜릿
당시 브뤼셀에는 이미 수많은 쇼콜라티에가 있었고, 대부분은 자신의 브랜드를 앞세우기보다 백화점이나 상점의 이름 아래 제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초콜릿은 장인의 기술이었지만, 브랜드 산업은 아니었다.
조셉 드랍스의 세 아들
부드러운 크림이나 페이스트, 캐러멜 등을 채운 한입 초콜릿은 지금도 고급 초콜릿 매장에서 하나씩 골라 담는 작은 초콜릿으로 이어지고 있다. 초콜릿 속의 맛과 식감을 어떻게 살리느냐가 핵심인 장인의 기술이었다. 피에르 드랍스는 그의 세 아들 조셉, 프랑수아, 피에르 주니어에게 어린 시절부터 초콜릿 제조 기술을 알려주고 가업으로 그 일을 명예롭게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피에르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세상을 떠났고 3형제는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작업장을 운영해나갔다.
브뤼셀의 고디바 매장
아버지의 부재, 결단을 내린 형제
전쟁이라는 불안정한 시기 속에서도 세 형제는 브뤼셀 몰렌베이크에 있는 가족집 1층에서 작업장을 계속 운영했다. 당시 유럽은 원료 수급이 불안정했고 설탕과 카카오는 귀한 자원이었지만, 전쟁이 끝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작은 사치와 선물을 찾기 시작했다. 초콜릿은 가장 빠르게 회복된 소비 품목 가운데 하나였다.
피에르 드랍스
바로 이 시점에서 드랍스 형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단순한 납품업체로 남는 대신 자신들의 가게를 내겠다는 것. 세계2차대전이 종료된 1945년. 형제는 처음으로 제품에 브랜드를 붙인다. 바로 ‘고디바(Godiva)’였다. 이 이름은 조셉 드랍스의 아내 가브리엘이 제안한 것이었다. 고디바는 영국 전설 속 인물인 레이디 고디바에서 따왔다.
세금을 깎기 위해 벌거벗은 레이디 고디바
이야기의 배경은 11세기 영국 중부의 도시 코번트리. 이 지역을 다스리던 영주인 레오프릭 백작은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왔다. 과도한 세금으로 시민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불만과 고통은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다. 백작의 아내였던 레이디 고디바는 이 상황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녀는 남편에게 여러 차례 세금을 낮춰달라고 요청했지만, 백작은 쉽게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실상 거절의 의미로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말을 타고 도시를 한 바퀴 돈다면 세금을 낮춰주겠다는 것이었다.
레이디 고디바 , 존 콜리어 작, 1897년 그림
당시 귀족 여성에게 명예와 체면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다. 사회적 지위와 개인의 존엄을 모두 내려놓아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고디바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긴 머리로 몸을 가린 채 말을 타고 코번트리 거리를 조용히 행진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시민들의 배려였다. 그녀의 결심을 알게 된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모두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려 그녀를 보지 않았다. 개인의 희생과 공동체의 배려가 동시에 작동한 순간이었다.

결국 레오프릭 백작은 약속을 지켰고, 세금은 낮아졌다. 이 이야기는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지며 용기와 품격, 그리고 타인을 위한 헌신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다. 19세기에는 회화와 문학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 특히 말을 탄 여인의 모습은 오늘날까지 레이디 고디바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흥미로운 건, 이 전설이 완전한 허구로만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학계에선 레이디 고디바의 원형이 실존 인물일 가능성을 꽤 진지하게 다룬다.

실마리는 1086년, 윌리엄 1세가 작성한 토지조사부 둠즈데이북이다. 이 문서에 11세기 코번트리를 다스리던 머시아 백작 레오프릭의 아내인 고디푸(Godgifu 혹은 Godgyfu)가 등장한다. 고디푸는 앵글로색슨어로 ‘신의 선물’에 가까운 뜻으로, 이 이름이 라틴어식으로 변행된 것이 고디바라는 해석이 많다.

오늘날 영국 코번트리에는 레이디 고디바 동상이 서 있고, 그녀의 이름을 딴 축제도 이어진다. 전설이 도시의 기억이자 정체성이 된 셈이다.

다만 ‘알몸으로 말을 타고 도시를 돌았다’는 결정적 장면은 지나치게 파격적이라, 후대의 각색인지 상징적 장치인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돼왔다. 그럼에도 관행과 권력의 상식을 정면으로 거슬러 대담한 방식으로 관철하는 정치적 몸짓을 가리켜 고디바이즘(godivaism) 같은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결국 레이디 고디바는 사실과 전설의 경계에서, 용기와 배려의 상징으로 살아남은 이름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책임, 고디바가 되다
이처럼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용기를 상징하는 레이디 고디바의 전설은 단순한 귀족적 우아함에 머물지 않는다. 그 이야기에는 타인을 위한 배려와 책임, 그리고 스스로를 내려놓는 선택이 담겨 있다. 고디바가 이 이름을 브랜드로 선택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달콤함을 파는 회사를 넘어,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전하는 상징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디바의 로고에는 지금도 말을 탄 여인의 실루엣이 들어 있다. 그것은 장식이 아니라 브랜드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의미다. 달콤함을 파는 기업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전하는 순간에 선택되는 이름이 되겠다는 약속과도 같다.

드랍스 가족의 전략은 유효했다. 수많은 초콜릿 납품업체와의 브랜드 차별화에 성공한 그들 가게는 초콜릿을 ‘선물의 상징’으로 바꾸는데 성공했고 그 과실을 달콤하게 누렸다 .

고디바 로고
이름을 얻은 초콜릿 가게, 특별해지다
이름을 얻은 뒤 변화는 빨랐다. 형제는 브뤼셀 코켈베르크의 레오폴드 2세 대로에 첫 번째 매장을 열었다. 더 이상 백화점 뒤에 숨은 공급업체가 아니라, 소비자를 직접 찾아가는 브랜드가 된 것이다. 불과 6개월 만에 휴양지 크노케에 두 번째 매장을 열었고, 고디바는 빠르게 ‘특별한 날을 위한 초콜릿’이라는 이미지를 얻기 시작했다.

이 시기 고디바가 주목받은 이유는 제품 자체보다 전략에 있었다. 금빛 상자와 정교한 포장, 한 입 크기의 프랄린 구성, 그리고 매장을 통한 직접 판매. 이는 당시 벨기에의 전통 쇼콜라티에들이 주로 지역 고객을 상대하던 방식과 달랐다. 고디바는 처음부터 관광객과 선물 수요를 겨냥했고, 초콜릿을 기념품이자 의례 상품인 것으로 포지셔닝했다.

벨기에 왕실 공식 쇼콜라티에 지정 증서
1950년대에 들어서며 고디바는 벨기에 전역으로 매장을 확대했고, 1958년에는 이미 20개 매장을 운영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같은 해 파리 생토노레 거리에 첫 해외 매장을 열며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나섰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온다.
엑스포를 만난 고디바, 고급화에 성공하다
1958년 브뤼셀 세계박람회(엑스포). 전후 유럽의 재건과 산업 역량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열린 이 행사에서 고디바의 초콜릿은 국제 관람객들에게 소개됐다. 당시 박람회는 전 세계 수천만 명이 방문한 대형 행사였고, 벨기에 초콜릿의 정교함과 선물 문화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박람회를 계기로 고디바는 단순한 지역 브랜드를 넘어, ‘벨기에를 대표하는 고급 초콜릿’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다.

같은해, 고디바는 브뤼셀 그랑플라스에 부티크를 열어 단지 파는 곳이 아니라 ‘가야 하는 곳’으로 거듭났다. 사람들이 비싼 것을 사러 가는 거리, 도시가 자기 체면을 걸고 내놓는 공간으로 들어간다. 고디바는 편의점 진열대가 아니라 의례의 무대에 서고자 했다. 고급 초콜릿이란 별명은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글로벌 브랜드가 된 고디바, 본질을 지키다
시간이 흐르며 고급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는 글로벌 기업의 문법속으로 들어간다. 1966년 캠벨 수프 컴퍼니가 고디바 지분의 3분의 1을 인수하고 본격적으로 미국 땅에서 판매되기 시작한다. 캠벨은 미국 시장을 위한 고디바 초콜릿을 생산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주 레딩에 제조 시설을 운영했다. 그렇게 1972년, 북미 최초의 고디바 매장이 뉴욕시 5번가에 문을 열었다 . 같은 해, 고디바 초콜릿은 도쿄 중심부의 백화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1974년, 드랍스 가문은 고디바의 모든 소유권을 캠벨 수프 컴퍼니에 매각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캠벨은 미국과 전 세계에서 고디바의 입지를 크게 확장했다.
미국 뉴욕 5번가 고디바 부티크 매장
이후 고디바는 터키의 윌드즈 홀딩으로 넘어간 뒤 2019년엔 MBK파트너스가 일본·한국·호주 등 일부 지역 운영을 가져갔고 운영 주체가 나뉘어졌다. 소비자의 눈에는 같은 로고, 같은 상자, 같은 이름이지만, 실질적 지배권이 흩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디바는 여전히 고디바라는 브랜드로 남아있다.
100년을 버틴 고디바, 명품 초콜릿의 가치
다시 발렌타인데이. 1926년 브뤼셀의 조리대에서 출발해 100년을 버틴 고디바는 초콜릿을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로 봤다. 전쟁이 끝난 뒤 드랍스 가족은 맛보다 먼저 이름과 장면을 만들었다. 레이디 고디바의 전설을 얹어 초콜릿을 ‘선물의 상징’으로 바꾸고, 금빛 상자와 매장을 통해 “특별한 날에 선택되는 브랜드”라는 자리를 확보했다.
고디바 브랜드
이후 소유 구조가 바뀌고 운영 주체가 나뉘어도, 소비자는 그 가치를 소비했다. 고급 제품의 정체성은 결국 비싼 가격이 아니라, 비싼 약속을 지키는 방식이라는 것을 고디바는 100년 동안 반복해 보여왔다.

결론은 단순하다. 달콤함은 사람을 끌어당기지만, 신뢰는 사람을 남긴다. 발렌타인데이의 금빛 상자는 그 문장을 증명해온 100년의 포장지다.

[흥부전]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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