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끝은…항상 뒤끝? 그런 끝, 끝!
“명절증후군은 명절을 겪고 나서 생기는 병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오기 전부터 이미 시작돼 있지요.” 30년 넘게 명절 전후 내원객들을 만나온 정신과 전문의 김진세 원장(고려제일 정신건강의학과)은 이렇게 말한다. 명절증후군은 한때 ‘주부들의 명절병’ 정도로 불렸지만, 지금은 양상이 다르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층까지, 미혼·기혼 여부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명절에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나타난다. 문제는 명절이라는 시간 자체보다, 그 시간에 사람들이 서로에게 기대하는 역할과 말, 태도다. 김 원장은 “명절증후군은 참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며 “오히려 미리 준비하고 조정하면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번 설 명절만큼은 명절증후군 없이 보내고 싶은 이들을 위해 김진세 원장이 ‘사전 대비 처방전’을 써주었다.
1. 관심이라면서 평가를?

어린이·청소년
모른다 해도 괜찮아 답하지 않을 권리를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명절을 힘들어하는 아이들은 의외로 많다. 김 원장은 “아이들에게 명절은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공개 평가의 장이 되기 쉽다”고 말한다. 세뱃돈으로는 치유가 되지 않는다. “요즘 공부는 잘하니?” “너는 커서 뭐가 될 거야?” “사촌 형은 이번에 상 받았다더라.” “대학 가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어른에게는 가벼운 말이지만, 아이에게는 ‘나는 지금 시험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명절이 끝난 뒤 집중을 못하거나 이유 없는 짜증으로 병원을 찾는 아이들 중 상당수가 이런 경험을 공통으로 말한다. 김 원장의 처방은 단순하다. 아이에게는 대답하지 않을 권리를 먼저 알려주라는 것이다. “아이에게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도 되고, 지금 말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도 된다’는 걸 부모가 먼저 알려줘야 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대화를 끊어본 경험이 없으면, 명절 내내 속으로만 삼키게 됩니다.” 부모에게도 주문이 있다. 아이 대신 답해주려 들지 말고, 아이의 말을 짧게 지지해주라는 것이다. “‘아직 고민 중이에요’라고 아이가 말하면, 옆에서 ‘그게 당연하지’라고만 덧붙여 주세요. 그 한마디가 아이를 지켜줍니다.”
2. 지금은 미생 불안해요

20~30대 청년층
취업 등 민감한 주제 피하는 게 상책이죠
미혼이든, 기혼이든 20~30대는 명절에 유난히 많은 질문을 받는다. 취업, 연애, 결혼, 집, 정치 지향까지 대화의 소재는 끝이 없다. 김 원장은 “이 세대의 명절증후군 핵심은 미완성 상태에 대한 낙인 공포”라고 말한다. “아직 과정 중인데, 명절에만 오면 인생의 중간 점검을 당하는 느낌을 받는 거죠.” 특히 최근에는 정치·사회적 이슈로 인한 갈등도 잦다. 부모 세대와 가치관이 다르다는 사실을 명절 식탁에서 확인하고 나면, 피로감은 배가된다. 김 원장의 처방은 ‘설명하지 말 것’이다. “명절에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들면 거의 다 실패합니다. 오히려 더 상처만 남아요. ‘그 얘기는 오늘은 안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건강한 선택입니다.” ‘본가’에 머무는 체류 기간을 미리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언제까지 있다가 돌아갈지’를 명확히 하면, 마음의 긴장이 크게 줄어든다.
3. 고위험군 1위

기혼 여성
“난 여기까지만 할게” 명절 전 사전 공지를
김 원장이 단연코 ‘명절증후군 고위험군’으로 꼽는 집단은 기혼 여성이다. 과거보다는 줄었다고 하지만, 음식 준비, 접대, 정리·정돈, 갈등 해결까지 한꺼번에 떠안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명절이 끝난 뒤 우울증, 공황 증상으로 병원을 찾거나, 이전의 정신적인 고통이 악화되는 분 중 상당수가 며느리 역할을 수행한 여성들입니다.” 김 원장은 이들에게 ‘사전 공지’를 가장 중요한 처방으로 꼽는다. “명절 당일에 ‘힘들다’고 말하면 갈등이 됩니다. 최소한 명절 전에 ‘이번엔 여기까지만 할 수 있다’는 선을 알려야 합니다.” 또 하나, 배우자의 역할도 분명히 짚는다. “남편이 중간에서 조용히 넘어가면, 그 침묵의 대가는 아내가 치르게 됩니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하겠다’는 사전 공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명절이 끝난 뒤의 회복 일정도 미리 확보하라고 조언한다.

4. 앓는다, 속으로
기혼 남성
중립은 불화만 키울 뿐
기혼 남성들은 겉으로는 비교적 멀쩡해 보인다. 하지만 김 원장은 “이들은 감정을 말하지 않는 대신 신체 증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명절 후 심한 위통, 두통, 불면으로 병원을 찾는 남성들 상당수가 ‘중간자 스트레스’를 겪었다고 털어놓는다. 부모와 아내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한 채 버틴 결과다. 김 원장의 처방은 명확하다. “중립은 안전한 위치가 아닙니다. 침묵은 방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요.” 부모에게는 부부의 기준을, 배우자에게는 분명한 지지를 표현하라고 조언한다. “그 한 번의 입장 표명이 이후 수년간의 명절을 바꿔놓기도 한다”고 그는 말한다.
5. 아이들이 왜 이럴까

중장년 부모세대
자녀도 이젠 ‘손님’…예전 방식의 효도 기대 마세요
50~60대 부모 세대 역시 명절증후군에서 자유롭지 않다. 자녀가 예전처럼 오래 머물지 않고, 각자의 일정만 소화하다 떠나는 모습을 보며 허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김 원장은 “이들의 상처는 명절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에서 온다”고 설명한다. “예전 방식의 효도를 기대하면 계속 실망하게 됩니다. 자녀를 ‘손님’처럼 맞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질문을 줄이고, 평가 대신 공감을 늘리는 것이 가장 큰 처방이다. “요즘 힘들지?”라는 한 문장이 관계를 살릴 수 있다.
6. 사람 속에서도 외롭다

노년층
명절에도 자기 일정·즐거움 함께 챙겨야
70대 이상 노년층 중에는 명절이 끝난 뒤 더 큰 공허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자녀와 손주가 떠난 집에 홀로 남는 순간, 외로움이 몰려온다. 김 원장은 명절을 가족에게만 맡기지 말라고 조언한다. “명절을 ‘가족 독점 이벤트’로 생각하면 실망이 커집니다. 자신의 일정과 즐거움을 함께 두세요.” 정치나 갈등 주제를 스스로 피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다.
명절증후군 피하기, 세 가지를 기억하자

“명절증후군은 참아서 생기고, 미리 조율하면 예방됩니다. 모든 질문에 답할 필요도 없고, 모든 역할을 떠안을 필요도 없습니다.” 설 명절을 앞둔 지금, 김 원장이 권하는 최소한의 준비는 세 가지다.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정해두는 것, 회복할 시간을 미리 확보하는 것, 그리고 ‘이번 명절의 목표는 무사히 지나가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처방전마저 필요한 명절이라면 차라리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도 들 것이다. 그래도 명절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명절을 함께 보내야 한다면 ‘조금 덜 완벽해도 괜찮은 명절’이면 어떨까. 명절증후군을 막는 가장 현실적인 처방으로 말이다.
장회정 선임기자 long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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