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퀴즈'도 인정한 영화 상단 자막 센스, 오늘은 또 어떤 ‘드립’이 기다리고 있을까[위근우의 리플레이]

고희진 기자 2026. 2. 14.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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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N 편성 담당자 이효원씨가 출연한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 방송 화면 캡처. tvN

늦잠을 자고 일어난 지난주 일요일 점심. 관성처럼 거실에 앉아 TV를 켜자 케이블 영화채널에선 이경규가 제작한 영화 <전국 노래자랑>이 방영 중이었다. 뭔가 음치 캐릭터를 연기 중인 듯한 고 김수미 배우를 멍하니 보다 잠시 시선을 위로 돌렸다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화면 우측 상단 영화 제목 위엔 다음과 같은 소개 자막이 있었다. ‘9번인 줄 알고 오신 분들 대환영’.

한국에서 일요일 낮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타이틀이 지닌 맥락을 아는 이라면 누구든 미소 지을 법한 좋은 농담. 마침 지난 4일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이하 <유퀴즈>)에 영화채널 OCN 영화 소개 자막으로 유명해진 편성 담당자 이효원 씨가 화제의 인물로 출연하기도 했지만, 평범한 영화 소개와 다른 유머러스한 자막의 존재에 대해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응원하는 중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이거 참신하다 싶은 자막을 보면 사진으로 남기거나 기억해두는 편인데, 가령 얼마 전 <매트릭스>에는 ‘빠빠빠 빨간약 궁금해 허니’라는 자막이, 톰 크루즈의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 외벽 등반 장면으로 유명한 <미션 임파서블 4>에는 ‘두바이엔 두쫀쿠가 없다는 걸 몰랐던 톰 크루즈의 부르즈 할리파 액션’이란 자막이 달렸다. 모든 자막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여태 본 중 최고의 걸작으로는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마겟돈> 소개 자막을 꼽고 싶다. ‘에스파 이전에 브루스 윌리스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막을 볼 때마다 즐거운 건, 유머 감각이 항상 탁월해서는 아니다. 언제나 ‘학생들이 실수로 많이 검색하는 영화’ <듄> 같은 최상의 멘트가 나올 수는 없다. 노력했지만 인상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고, 개인 취향 때문에 유행하는 온라인 밈(meme) 활용엔 좀 시큰둥한 편이다. 그럼에도 담당자들이 뭔가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항상 보는 재미가 있다. 별 생각도 기대도 없이 채널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와중에 누군가 공격적이지 않은 농담을 갑자기 훅 던지며 일상에 아주 작고 유쾌한 파문을 일으키는 그런 재미. 이 농담은 말하자면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받은 작은 선물에 가깝다.

<유퀴즈>에 출연한 이효원 편성 담당자는 “비슷한 업무 패턴 중에 저의 일을 재밌게 하려던 것 뿐”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상단 자막이 시청자들에게 통한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재밌어서 하는 일일수록 창의력이 발휘되어서만은 아니다. 편성 담당자에게 유머러스한 상단 자막 작업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다. 케이블 채널 영화 소개 자막이 천편일률적이라고 화낼 시청자는 없다. 공을 들인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가기도 십상이다. 첫 ‘드립’을 시도한 <소림축구> 자막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아스널 FC 선수들의 이름을 넣으며 이효원 씨 역시 ‘아무도 안 보겠지?’라고 생각했다. 주목받지 못할 걸 알고도 그냥 해보는 마음. 뒤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주는 마음. 기브 앤드 테이크의 맥락에서 벗어난 어떤 열정은 바로 그 이유로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이 경험이 기분 좋은 건, 웃음 이전에 상냥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누가 볼지 안 볼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연히 보게 될 당신이 웃으면 좋겠다는 그런 상냥함을 상상하며 피식 피식 웃게 되는 것이다. 잠이 덜 깬 일요일 낮, <전국 노래자랑> 소개 자막으로 하루의 시작이 상쾌해지는 것처럼.

OCN 편성 담당자 이효원씨가 출연한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 방송 화면 캡처. tvN

케이블 영화 상단 자막 외에도 도파민을 자극할 유머 콘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그 자막들이 주는 상냥한 웃음의 경험은 웃음의 강도와 별개로 고유한 의미를 갖는다. 당장 웃음을 목적으로 TV나 OTT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찾거나 숏츠를 둘러볼 때, 나의 마음은 철저히 소비자 입장이 된다. 판매자가 웃기려고 만들었다면 콘텐츠 소비자인 나에게 웃음을 줘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지 못한 내가 손해라는 그런 입장. 웃기지 않았다고 블랙컨슈머가 되어 별점 테러를 하진 않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을을 대하는 갑의 눈은 곱지 않기 마련이다. 심지어 콘텐츠가 웃길 때조차도 마치 맡겨놓은 웃음을 받아 가듯 당연하게 여긴다. 딱히 고마움은 없다. 나의 OTT 구독료가, TV 프로그램 사이 건강기능식품 광고를 견디는 시간이, 내가 그들에게 지불하는 재화이며 소비자로서 온당 누릴 권리와 지위를 보증한다 믿으므로. 소비자 정체성에 익숙해지는 게 문제인 건, 비정한 갑질을 해서만은 아니다.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과 감각 어딘가가 조금씩 망가지기에 문제인 것이다. 그러다 영화 채널에서 뜬금없이 웃기는 소개 자막을 보면 ‘손님은 왕’ 모드에 균열이 생긴다. 그냥 영화를 편성하기만 하면 되는 채널에서, 소비자로서 딱 그만큼만 기대했던 자리에서, 갑자기 누군가 찡긋 웃으며 ‘서프라이즈’를 외치며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준 셈이다. 왜? 굳이? 시키지도 않은 걸? 그 잉여의 당혹스러움이 구매라는 행위로 환원될 수 없는 콘텐츠 생산자와 나 사이의 관계와 경험의 맥락을 회복시켜준다.

OCN 영화 상단 자막의 느슨한 팬 중 하나로서, 이효원 씨의 <유퀴즈> 출연이 반가웠던 건 그래서다. 궁금했던 인물을 실제로 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이 선물해 준 일상 속 뜻밖의 즐거움에 대한 시청자의 고마움과 관심이 <유퀴즈> 섭외라는 역시 뜻밖의 선물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전해지길 바라서다. 다행히 그도 덕분에 리프레쉬 되었다고 밝혔다. 뭔가를 만들어주는 것, 또한 그걸 재밌게 봐주는 것 모두 서로에게 감사한 일이다. 소비자-판매자 관계에만 익숙해지면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 감정을 바탕으로, 영화채널이니까 당연하게 여겼던 영화 편성이라는 작업에 담당자들이 어떤 정성과 고민을 들이는지 이해하고 더는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도 이번 <유퀴즈>의 성취라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앞으로 또 마동석 영화냐고 툴툴댈 일은 줄어들 것 같다. 조금만 관심을 두고 둘러보면 고마워할 일은 많고, 고마움에 대한 고마움은 순환한다.

그러니 담당자의 방송 출연으로 유명세를 탔다고 앞으로의 상단 자막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연한 것은 없으며, 조금도 당연하지 않은 서로에 대한 호의를 통해서만 우리는 소비자-판매자 구도에서 벗어나 대상과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담당자들 역시 시청자의 기대감 때문에 너무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마움이 순환하듯, 부담감도 순환한다. 선물이란 그래선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웃음의 강도보다, 준비하는 그 마음이 더 소중하므로. 물론 예외는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아스널 FC 우승이 가까워진 이번 시즌 혹 22년 만의 리그 우승을 했을 때 어떤 영화에 어떤 멘트로 팬으로서의 사심을 드러낼지 기대 가득 지켜보고 있다.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프리키 프라이데이 2>, 22년 만의 속편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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