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없이 들고 나가도 절도 아닙니다”…서울 곳곳에 있다는 마트의 정체

이수민 기자(lee.sumin2@mk.co.kr) 2026. 2. 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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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계층 든든한 버팀목 역할
서울시 자치구 운영 ‘푸드마켓’
식품·생필품 등 무료로 가져가
설 앞두고 부침가루·당면 인기
이용자 만족도 91%에 달하지만
고물가에 일부 품목 수급 어려워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푸드뱅크·마켓 1호점에서 이용객이 장을 보고 있다. [김재훈 기자]
“대형마트에 가면 5만원이나 써야 하는 물건들을 그냥 받아가니 정말 큰 도움이 되죠. 오늘은 서비스도 많이 받아서 집에 가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어요.”

12일 오전 매일경제가 찾은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푸드뱅크·마켓 1호점. 겉보기에는 일반 마트의 모습과 다르지 않지만, 계산대에서 돈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장을 보듯 물건을 담은 이용자들이 계산 없이 매장을 나서고, 직원들은 웃으며 이들을 배웅한다.

설 명절을 앞둔 이날도 점심시간을 앞두고 이용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매장을 나서는 이들의 손에는 푸드뱅크에서 준비한 모둠전과 건강기능식품, 샤인머스캣 등 설 선물이 들려 있었다. 이용자들은 선물을 양손 가득 안은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기업과 개인이 기부한 물품을 취약계층이 직접 선택해 가져갈 수 있는 푸드뱅크·마켓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긴급지원대상자, 차상위계층, 생계・의료급여 수급 신청 탈락자, 기초생활수급자 등은 주민센터를 통해 신청한 뒤 서울시 25개 자치구 상설 무료 마켓을 방문해 필요한 물품을 직접 고를 수 있다.

매장에는 라면, 쌀, 참기름, 시리얼 같은 식료품부터 샴푸, 화장품 등 생필품까지 빼곡히 진열돼 있었다. 이곳의 계산 단위는 ‘원’이 아닌 ‘품목’이다. 물품마다 차감 품목 수가 달라 이용자는 매달 한 차례 방문해 총 다섯 품목을 가져갈 수 있다. 차상위계층 한유석 씨(63)는 쌈장과 샴푸, 컨디셔너, 카레를 신중히 고르며 2월 장바구니를 채웠다. 한씨는 카운터에 비치된 빵과 냉동 김말이, 생수, 설렁탕 등 ‘서비스’ 물품도 추가로 담았다.

명절 전후로는 이용자가 더욱 몰린다. 14년째 이 지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양유 씨(59)는 이날 오전 9시부터 쉬지 않고 손님을 응대했다. 김씨는 “평소에는 라면과 쌀이 많이 나가지만, 이번주는 설 음식을 준비하려는 분들이 부침가루와 당면을 많이 찾는다”며 “명절을 앞두고는 항상 바쁘다”고 말했다.

이날 매장을 찾은 방향순 씨(86)는 “혼자 살아서 설에 음식을 잘 못 해 먹는데, 선물을 받아가는 기분이라 너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아내와 함께 장을 본 최 모씨(74)도 “잡채를 해 먹기 위해 당면을 담았다”며 “건강 챙기라고 침향단도 주고, 명절 분위기가 나서 좋다”고 말했다.

서울잇다푸드뱅크센터에 따르면 최근 연간 35만가구 안팎이 기초푸드뱅크·마켓을 이용하고 있다. 이용자들은 전반적으로 고령층 비중이 높은 편이다. 영등포구에는 3개 지점이 운영 중인데, 전체 이용자 2000여 명 가운데 약 70%가 60대 이상이다.

기부금도 다시 증가하는 추세다. 2024년 422억원이던 기부 실적은 2025년 500억원으로 15.6% 증가했다. 서울잇다푸드뱅크센터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주춤했던 기부금이 최근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며 “개인·기업 기부자 수와 모금액 모두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사랑나눔푸드뱅크·마켓 1호점에서 이용객들이 줄을 서 있다. [김재훈 기자]
이용자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지난해 12월 영등포구 푸드뱅크·마켓에서 실시한 ‘2025년 하반기 만족도 조사’ 결과, 응답자 210명 중 약 91%가 식품·생활용품 지원이 생계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다만 물가 상승으로 잡곡류 등 일부 품목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으면서 현장에서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나온다. 성정환 영등포푸드뱅크·마켓 1호점 점장은 “이용자들이 쌀, 서리태, 적두 등 잡곡류를 많이 찾지만, 가격이 올라서 재고를 충분히 채우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날 적두가 놓였던 자리에는 이날 컵밥이 대신 진열돼 있었다.

이용자 민 모씨(65)는 “즉석식품보다도 쌀밥과 먹을 반찬거리가 필요하다”며 “물품이 조금 더 다양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만족도 조사에서도 과일과 반찬류, 생선, 김치 등이 추가로 필요한 품목으로 꼽혔다.

전문가들은 푸드뱅크·마켓이 단순한 물품 지원을 넘어 지역 공동체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식품과 생필품 같은 필수재를 중심으로 공동체 지원이 구체화될 수 있다”며 “사업의 사회적 효능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기업·개인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냥드림’ 사업과의 연계를 통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발굴하는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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