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948년 동계올림픽 첫 참가…이효창 빙속 1500m 19위

2026. 2. 14.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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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스포츠 라운지
1896년 아테네올림픽 개최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주요 인사들. 뒷줄 왼쪽부터 게브하르트, 구트-야르코프스키, 케메니, 발크. 앞줄 왼쪽부터 쿠베르탱, 비켈라스, 부토프스키. 동계올림픽 출범에 기여한 발크의 공로는 하계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에 비견할 만하다. [사진 위키미디어]
근대올림픽이 고대올림픽에 연원을 둔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대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에서 서기 393년 사이에 4년마다 개최되어 제293회까지 계속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올림픽은 여름과 겨울 종목으로 나눠 치른다. 두 올림픽이 유전자 본체(DNA)의 이중나선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이중나선은 근본이 같지 않다. 하계올림픽은 지중해, 동계올림픽은 유럽대륙과 산맥에 뿌리를 둔다. 그래서 올림픽은 전(全)지구적 제전이다.

지중해는 올림픽을 넘어 스포츠 문화의 고향이다. 피에르 쿠베르탱은 박제(剝製)와 같은 인물이었다. 1900년, 그는 영구 개최를 원하는 그리스의 뜻을 꺾고 올림픽을 파리로 가져갔다. 그리스에 흩어진 대리석 유물을 가져다 파리에 현대의 올림피아를 건설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파리박람회(올림픽을 포함한)를 총괄한 알프레드 피카르는 생각이 달랐다. 쿠베르탱의 생각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우스꽝스러운 짓이었다. 그래서 쿠베르탱의 주장을 묵살했다.

실존했다면 기원전 8세기경에 살았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보라. 트로이의 바닷가에서 그리스 병사들이 즐긴 운동은 전차경주, 권투, 레슬링, 육상, 무장무술, 원반던지기, 활쏘기, 창던지기 등이다. 경기 방식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지금도 저 경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동계 스포츠라면 알프스와 스칸디나비아에서 호적을 뒤져야 한다. 알파인과 노르딕이라는 설상종목의 구분도 마찬가지다.

하계는 지중해, 동계는 유럽대륙에 뿌리
하계올림픽은 1896년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다. 동계올림픽은 1924년 프랑스 샤모니대회가 처음이다. 동계올림픽이 따로 열리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1908년 런던올림픽 때 피겨스케이팅이 처음으로 정식종목에 포함됐다. 1916년 베를린대회도 동계종목을 포함하려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무산되었다. 1920년 안트베르펜대회는 피겨스케이팅과 아이스하키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했다.

하계올림픽의 틀 안에서 동계대회를 병행하는 데는 일정과 장소라는 면에서 한계가 명확했다. 1908년 런던대회의 동계종목 경기는 10월에 따로 했다. 1920년 안트베르펜대회도 아이스하키 경기는 4월에 열었다. 1924년 샤모니대회도 처음부터 올림픽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처음엔 파리올림픽의 부속 행사로 기획되었다. 명칭은 동계스포츠주간(Semaine Internationale des Sports d’Hiver)이었다.

동계스포츠주간에는 16개국 258명이 참가해 6개 종목(피겨스케이팅·스피드스케이팅·아이스하키·노르딕복합·스키점프·컬링)에서 경쟁했다. 대회는 큰 성공을 거뒀다. 산간지방인 샤모니에 유료 관중이 1만 명 이상 몰렸다. 결승전 등 인기 있는 경기엔 구름관중이 모였다. 동계올림픽의 상업적 잠재력이 입증된 것이다. 성공에 고무된 IOC는 1925년 총회에서 헌장을 개정해 동계올림픽을 독립시켰다. 동계스포츠주간은 제1회 동계올림픽으로 소급해 인정했다.

스포츠사학자들은 대체로 1901년 스웨덴에서 시작된 노르딕 게임(Nordic Games)을 동계올림픽의 전신으로 본다. 노르딕 게임은 IOC의 동계스포츠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노르웨이·스웨덴 등 북유럽 회원국들은 동계종목을 올림픽에 포함하는 데 부정적이었다. 노르딕 게임의 권위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IOC가 올림픽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동계스포츠주간을 운영한 이유도 여기 있다. 노르웨이가 최다 메달(17개, 금메달 4개)을 기록한 샤모니대회가 분위기를 바꿨다.

동계올림픽의 역사를 살필 때 기억해야 할 이름이 있다. 빅토르 구스타프 발크. 스웨덴 사람이다. 동계올림픽 출범과 관련한 그의 기여는 올림픽의 창시자라는 쿠베르탱에 비견될 만하다. 발크는 1899년 스웨덴의 스포츠진흥중앙협회에 북유럽 국가들이 참여하는 종합동계대회를 제안했다. 1900년, 제1회 대회 개최를 위한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자 위원장을 맡았다.

발크의 뛰어난 면은 노르딕 게임을 여러 경기의 단순한 집합체로 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노르딕 게임을 관광을 포함한 겨울 문화 상품으로 인식한 것 같다. 그래서 노르웨이와 핀란드의 스포츠 기구, 관광협회와 철도회사들을 논의에 참여시켰을 것이다. 또한 종목을 정하고 규칙을 표준화했다. 발크가 20년 넘게 다듬어 놓은 노르딕 게임의 정교한 운영 매뉴얼 덕분에 동계올림픽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며 출범할 수 있었다.

발크도 처음에는 동계올림픽 창설에 반대했다. 샤모니에서 열린 동계스포츠주간의 성공을 확인한 다음 발크와 스웨덴 올림픽위원회는 방침을 바꿨다. 이 변화는 IOC가 샤모니대회를 제1회 동계올림픽으로 소급해 결정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발크는 분신과도 같은 노르딕 게임을 사랑했다. 그러나 스포츠의 국제적 확산이라는 IOC의 이상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북유럽 국가들이 샤모니대회 개최를 반대할 때는 설득을 통해 갈등을 줄이려 노력했다.

1948년 장크트모리츠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국명을 ‘Coree’라고 표기한 피켓을 들고 참가한 한국 선수단. 동·하계 통틀어 처음 참가한 올림픽이다. [중앙포토]
1948년 장크트모리츠대회(1월 30일~2월 5일)는 동·하계를 통틀어 한국이 참가한 첫 올림픽이다. 감독 최용진, 선수 이효창·문동성·이종국, 총무 겸 통역 월터 정으로 구성된 선수단은 입장식에서 국명을 ‘Coree’라고 표기한 피켓과 태극기를 들었다. 정부 수립 전이라 미군정 통치 아래 있었으나, 국제 스포츠계에 한국을 최초로 알린 역사적 순간이었다. 가장 좋은 성적은 이효창이 스피드스케이팅 1500m에서 기록한 19위(2분23초3)였다. 문동성이 훈련 중 발을 다쳐 최용진이 대신 출전하기도 했다.
1948년 동계올림픽 포스터. [중앙포토]
1992년 알베르빌대회에서 김윤만이 스피드스케이팅 남자1000m에서 사상 첫 메달(은)을, 김기훈이 쇼트트랙 남자1000m에서 첫 금메달을 따냈다. 이후 쇼트트랙은 한국의 금밭이 됐다. 2010년 밴쿠버대회에서 모태범·이상화가 스피드스케이팅,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을 따내면서 한국의 메달종목은 다양해졌다. 2018년 평창대회에서는 동계올림픽 참가 이래 가장 많은 메달(금 5개, 은 8개, 동 4개)을 따내 종합 7위를 차지했다.

올림픽은 국제적인 행사지만 국가적인 행사는 아니다. 우리는 메가 이벤트를 소위 ‘국가적인’ ‘세계적인’과 무엇으로 인식한다. 오랫동안 머리에 새겨 상식 또는 믿음으로 간직해온 스포츠내셔널리즘이라는 칩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한다. 태극전사, 국위선양…. 일제강점기에서 제3·제5공화국을 거쳐 오는 동안 쌓이고 다져진 사고의 단층 밑바닥에 한국 스포츠의 현재와 현장이 짓눌려 있다. 경기장, 훈련장, 학교, 언론, 연구자의 데스크까지.

올림픽 선수단 파견의 주체는 정부나 의회가 아니고 그 나라의 올림픽위원회다. 월드컵 대표 팀도 정부가 아니라 축구협회에서 파견한다. 설령 정부에서 파견한다 해도 국민에게 관심을 강요할 수는 없다. 국민이 선택할 문제다. 내가 대통령의 ‘붐 조성’ 언급을 떨떠름하게 들은 이유도 여기 있다. 우리 선수단이 자꾸 이기고 메달을 추가하면 분위기는 자연히 뜨거워진다. 그때 올림픽은 비로소 국민적인 관심사가 된다. 이게 순서다.

1924년 샤모니대회 유료 관중 1만명 몰려
동계올림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방송을 비롯한 미디어에도 좋은 일이다. 나는 종합편성채널에서 중계권을 확보했다고 해서 보편적 접근권이나 시청권을 침해한다고 보지 않는다. 디지털-다채널-다매체의 시대, 대세는 사람마다 손에 든 스마트폰과 패드, 노트북 등이다. 이와 같은 추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사실 논점은 채널의 도달 범위가 아니라 무료 시청이라는 관습과의 충돌일지 모른다. 이와 별개로, 메가 이벤트에 대한 무관심의 확대는 중계권 논쟁 따위가 아니라 스포츠의 근본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중계·보도 문화도 발전하기 바란다. 중계인지 응원인지 모를 감정의 과잉, 빙상스타 김보름에 대한 언론의 ‘살인미수’ 같은 폭력은 폐기할 때가 되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김상겸은 은메달을 따낸 뒤 가장 먼저 아내와 가족에게 감사했다. 국민도 대통령도 회장님도 아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자도 중계를 시청하느라 잠을 설치고 있다. 그래도 언론사에서 일할 때에 비하면 신선놀음이다. 메가 이벤트는 언제나 황홀한 감옥이었다. 힘겨웠으나 끝날 때는 항상 아쉬웠고, 폐막식 땐 벌써 다음 대회를 기다렸다.

허진석 한국체육대 교수. 스포츠 기자로 30여 년간 경기장 안팎을 누볐으며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지냈다. 2023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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