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 칼럼] 권력은 스스로 절제하지 않는다
정치사상의 고전적 통찰 새삼 떠올라
國體 위기를 견뎌냈지만 정치 복원은 요원
절제되지 않은 권력은 결국 시민들이 교정
정치는 발전하는가, 아니면 반복되는가. 정치학자들이 오래 붙잡아 온 질문이다. 미국 정치학은 오랫동안 발전 가능성을 설파해 왔다. 전통사회에서 근대국가로,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제도의 확산이 곧 정치의 성숙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민주주의는 이식될 수 있었지만, 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본성까지 함께 바뀌지는 않았다.
정치사상은 이 점에서 훨씬 신중했다. '권력은 스스로 절제하지 않는다.' 민주정도 타락할 수 있고, 공화정도 무너질 수 있으며, 선의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 같은 전통적 공화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익 추구 본성을 전제로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했다. 통제와 견제가 정치의 출발점이라는 얘기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정치의 성숙은 권력을 통제하는 장치의 정교화에 가깝다.
요즘 우리 정치를 보며 이런 고전적 통찰이 새삼 떠오른다. 계엄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중대한 헌정 위기를 거쳐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시민은 헌정 질서를 지켜냈고 민주주의 제도는 작동했다. 이는 분명한 성취다. 그러나 제도가 국체(國體)의 위기를 견뎌냈다고 해서 우리 정치가 한층 성숙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아직도 계엄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야당이 한심하지만 국정을 맡은 집권 세력의 책임은 훨씬 더 크다. 권력은 공백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집권 초반임에도 미래 권력 투쟁이 전면에 등장하는 모습은 대체 뭔가. 무슨 무슨 유튜버들이 여론을 호도하고 배후 권력을 행사한다는 논란도 뜨겁다.
그러다 보니 국정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권력 내부의 역학 관계만 고스란히 노출돼 뉴스를 장식한다. 온갖 정책이 쏟아지지만 적지 않은 것들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진영 결집의 수단이 되곤 한다. 개혁이라는 이름은 붙지만 사회적 논의의 축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수 의석이 조정의 자산이 아니라 집행의 근거로 기능하는 것이다. 힘이 있으니 밀어붙이는 방식, 그것이 반복된다.
결국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다. 승자독식의 권력 구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문화, 진영에 포획된 공론장. 이 조건이 유지되는 한 권력이 교체돼도 그 작동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대착오적 계엄 사태를 한 개인의 일탈이나 망동 정도로 환원하는 순간, 권력 작동의 구조적 교훈은 가려진다. 헌재가 대통령 파면 결정과 함께 '정치 복원'을 그리 강조했음에도….
결국 대화와 타협, 조율과 합의의 실종이 우리 정치가 넘어서야 할 가장 본질적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충분한 사회적 논의도 조율도 없이 중대한 제도 변화가 추진된다. 급기야 사법 권력을 입법 권력이 지배하려는 듯한 시도까지 벌어지고 있다. 입법·행정·사법 권력을 둘러싼 긴장과 균형이 약화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지만 이를 흡수할 공론의 장은 취약하다. 속도만 있고 숙의는 없다. 선동적 언어와 자극적 메시지가 여론을 선점하고, 정치인은 이를 다시 동원하는 일이 반복될 뿐이다.
정치는 권력을 다루는 기술이다. 권력을 장악하는 기술이 아니라 적절히 관리하고 활용하는 기술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권위'다. 권력에 대한 탐닉만 남고 권위가 사라지면 민주주의는 취약해진다. 그 권위는 힘이 아니라 다수 국민의 신뢰에서 나온다. 그 신뢰는 합의를 끌어내는 절차적 정당성, 절제된 권력 행사 등을 통해 하나둘 쌓이는 것이다. 절제는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제도적 훈련의 결과다.
국가적 위기를 겪고도 정치의 작동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건 국민에 대한 또 다른 신뢰 위배다. 절제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만이 자라고, 오만이 구조화 되면 위기는 반복된다.

정용관 시대 주필 yongari@sida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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