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부럽지 않은 ‘찐’ 로컬 맛 감자바우의 설은 밥상까지 넉넉-하다
허한 속 달래는 부드러운 양구 시래기
투박한 외모 속 알찬맛 겨울 효자 도치
손주 입 터지게 한 수리취떡·감자떡
바다 향 가득, 동해안 별미 비단멍게
자연이 담긴 소탈하지만 화려한 음식
한 상 차리면 마음까지 채워지는 명절
“강원의 맛과 함께 풍성한 설 보내세요”
올해도 어김없이 명절이 다가왔다. 새해가 됐으니 무엇을 먹을까. 사회상의 변화로 과거처럼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례상을 만드는 풍경도 많이 줄었다. ‘흑백요리사’ 등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프로그램의 음식들은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지, 이번 명절만큼은 정성껏 요리를 해서 먹을까 생각이 든다. 사실 그리운 것은 명절음식보다 옛날 밥상일 것이다. 강원도는 ‘감자바우’라는 말처럼 밥상에 온통 감자만 온라온 적도 있었고, 황탯국으로 어떻게든 겨울을 보냈다. 그 시절의 밥상은 추석보다 덜 풍성했을지 몰라도, 마음만큼은 어느 때보다 넉넉했다. 이른 새벽부터 정성껏 차례상을 준비하시던 어머니들의 노고를 기억하며 강원도민일보 문화부가 추천한 ‘설 명절 강원도 음식 처방전’을 소개한다. 명절 연휴 메뉴를 고민하는 이들을 위한 내리는 간편 처방전이기도 하다. 강원도의 음식은 상상 이상으로 소탈하고, 생각보다 화려하다. 그래도 만둣국 한그릇 정도는 꼭 드시길.

■ 버리면 쓰레기,말리면 귀한 음식 ‘시래기’
맛은 좋은데 왜 하필이면 이름이 쓰레기와 비슷한 시래기인지, 어렸을 때는 너무나 궁금했다. 북한이나 해외에서는 실제로 무청을 쓰레기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다. 어찌됐든 버리면 쓰레기고 말리면 시래기다. 흙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씻고 찬물에도 몇 번씩 담갔다 껍질을 벗기는 등 손질하는데 정성이 많이 들지만, 부드러운 시래깃국의 맛은 속을 달랜다.
시래기는 일교차가 심할수록 연하고 부드러워진다. 강원도에서 시래기는 귀한 음식이었다. 겨울철 모자라기 쉬운 비타민과 식이섬유가 풍부해 영양면에서도 으뜸이다. 지난해 추석 연휴 이재명 대통령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추천한 양구 펀치볼 시래기의 경우 시래기용 개량 무를 사용한다고 한다. 된장과 궁합이 특히 좋고 감자탕에 끓여넣으면 일품이다. 가정에서는 시래기를 보통 빨랫줄에 말렸는데, 도심에서는 종종 ‘실외기’에 걸어놓는다는 농담도 있었다.
“오늘은 눈이 오려나. 하늘을 쳐다본다. 그리운 친구도 없고 그리운 산만 있다. 시래기 시래기 나는 담장에 걸린 시래기야.”(이승훈 시 ‘무엇이 움직이는가’ 중)
■ 글로컬 만국공통음식 ‘감자’
흔히 강원도 사람들은 ‘감재’ 라고도 불렀다. 감자밥, 감잣국, 감자나물… 쌀이 귀하던 영서 산간의 주민들에게 감자는 저장성 좋은 만능 식재료였다. 과거 강원도 사람들은 흔히 화폐가 ‘감자’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감자가 없었다면 강원도 사람들의 삶은 더 팍팍했을 것이다. ‘불량감자’니 뭐니 해도 썩난 것까지 전분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감자는 농민들의 주요 수입원이자 ‘못생긴 효자’였다.
조리법은 달라도 세계 어디에서나 먹는 ‘만국공통음식’이니 이만한 글로컬식재료가 어디 있을까. ‘감자부치기’를 만들 때는 꼭 강판에 갈아서 드시길 권한다. 오래된 감자가루로 만드는 그 맛을 누가 알까. 돼지 등뼈로 우린 감자탕과 닭도리탕에도 ‘감자’는 빠져서는 안되는 중요한 재료다.
앞에 언급한 음식에서도 감자를 넣으면 도대체 안어울리는 것이 없으니 이쯤되면 감자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필요해 보인다. 선거철이면 ‘강원도 감자바우론’이 심심치않게 나오곤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어디선가 “봄감자가 맛있단다”라고 말하는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 속 점순이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 두쫀쿠도 좋지만 명절엔 역시 ‘떡’
설에는 떡이 빠지면 서운하다. 명절이 되면 할머니 손에 이끌려 단골 방앗간에 가곤 했다. 정성스레 맡긴 햅쌀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과 뜨거운 인절미가 나오면 꼭 할머니는 손주들 입이 터질 듯이 큰 떡을 넣어주곤 했다. 강원 사람들은 큰일에는 절편과 인절미를 주로 만들었다. 영동에서는 송편을 많이 만들고 ‘꾹꾹이떡’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영서는 옥수수, 감자, 수수, 메밀 등으로 만드는 떡이 많다.
강원에서는 ‘수리취떡’과 ‘감자떡’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수리취떡은 멥쌀가루와 삶은 수리취를 잘 찧어서 가래떡 모양으로 만든 후 수레바퀴 모양의 떡살로 모양을 찍어낸다. 감자떡은 감자를 강판에 갈아 반죽하고 삶은 팥소를 놓고 송편 모양으로 만들어 찐다. 감자범벅으로 강낭콩을 섞은 감자반대기를 얹어 찐 ‘감자붕생이’, 감자를 갈아 만든 ‘감자경단’도 별미다. ‘메밀총떡’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간식이다. 두쫀쿠도 좋겠지만 쑥개떡이 더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 생선 ‘명태’
겨울이 찾아오면 어머니는 무를 크게 깍둑 썰어 넣어 동태탕을 끓였다. 아버지는 새벽 이슬을 맞으며 먼 출근길을 나서기 전에 동태탕 국물을 크게 들이키곤 했다. 동태탕의 정취는 늘 마음을 달래주는 향수였지만, 국민 생선이었던 ‘명태’는 이제는 찾기 힘든 음식이 됐다. 고성과 속초를 중심으로 잡혔던 생선인 명태는 어획량 급감으로 러시아산 명태가 식탁 위에 오르고 있다.
싱싱한 명태를 토막치고 애와 곤지를 파와 함께 넣어 소금 간을 하여 맑게 끓인 ‘생태탕’은 명절에 가족들과 먹기 좋은 음식이다. 생태탕의 국물을 마시다 보면 어느새 노곤하게 풀린다. 밥과 함께 탕을 곁들어 먹다가,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어느새 콧잔등엔 땀이 맺힌다.
겨우내 덕장에서 명태를 말려놓으면 고단백의 황태가 된다. 황태의 등뼈와 가시를 발라낸 다음 고추장 양념을 발라 구우면 밥도둑 ‘황태구이’가 되고, 황태포를 계란과 파를 섞어 끓여내면 숙취해소에 좋은 황탯국이 된다. 해장하려 끓였다가 다시 술안주가 될 수도 있다.
■ 동해안의 복숭아 ‘비단멍게’
붉은 껍질 속에 오렌지빛 속살을 품은 멍게는 바다 향을 가득 머금은 별미다. 신선이 먹었다는 복숭아의 이름을 붙여 ‘바다의 복숭아’라 불릴 만큼 영양이 풍부하고 때깔이 곱다.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비단멍게는 동해안의 특산종으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돌토돌한 참멍게와 달리 껍질이 매끈한 것이 특징이다. 특유의 강한 향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쌉싸름하면서도 씹을수록 은은한 단맛과 화한 풍미가 오래 남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없어서 못 먹는 귀한 음식이다.
강릉에서는 예로부터 추석과 설 명절에 멍게를 물김치에 넣어 시원하게 즐겼다. 여러 음식을 먹은 뒤 입안을 정리해 주는 개운한 맛 덕분인데, 찬 성질을 가진 멍게를 식생활에 활용한 조상들의 지혜이기도 하다. 특히 강릉 향토 음식인 ‘해홍 감자 물김치’는 찐 감자를 으깨 넣어 구수한 맛을 더하고 깊은 풍미를 낸다. 명절날 고향을 찾은 자식들에게 알싸한 바다의 향과 함께 그리운 기억으로 남았던 정겨운 음식이다. 소금에 절여 물기를 뺀 뒤 젓갈로 담가도 일품이다.
■ 못생겨도 맛은 좋은 효자 생선 ‘도치’
동해안 시장에서 배를 뒤집은 채 누워 있는 도치는 반전의 매력을 선사한다. 표준명이 ‘뚝지’인 이 생선은 심통 맞게 생긴 외모 탓에 ‘심퉁이’나 ‘물텀벙이’라고도 불린다. 예전에는 그물에 걸려도 버려지기 일쑤였으나, 지금은 사라진 명태를 대신해 동해를 대표하는 겨울철 효자 생선이 됐다.
강원 영동 북부 지역에서는 도치를 제사상에 올리는 독특한 풍습도 전해진다. 전통적으로 제례 음식에는 ‘치’ 자가 들어간 생선을 쓰지 않지만, 험한 겨울 바다에서 제물을 구해야 했던 지역민들은 도치를 ‘심어’라고 이름을 바꿔 부르며 정성을 다했다. 도치는 비린내가 거의 없고 식감이 쫄깃한데, 그중에서도 주인공은 단연 알이다. 김치와 함께 알을 듬뿍 풀어 끓여낸 ‘도치 알탕’은 오독오독 터지는 식감이 일품이다. 외모는 투박해도 속은 알찬 도치의 살과 알을 경험하면, 왜 겨울 동해안의 진미로 손꼽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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