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숙의 시니어하우스 일기] [9] 치매라는 ‘어두운 동굴’에 아주 작은 빛
마사지를 하던 헬스 트레이너가 웃는다
둘의 다정한 모습, 연인처럼 아름답구나
‘당신의 세상 얼마나 적막한가요’ 묻는다
그녀의 쓸쓸하고 춥고 의미 없는 시간에
작은 빛이 되어주는 그 젊은이가 고맙다

아침나절에 글 한 줄 써볼 양으로 노트북을 열었다가 소득도 없이 오전 시간을 날려버렸다. 그런 나에게 벌주려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입맛 없다는 핑계로 식당에 내려가는 대신 우유와 시리얼로 점심을 때웠다. 그러고는 비타민 한 알 입에 털어 넣고 발딱 일어났다. 요럴 때 TV 앞에서 알짱거리다가는 허접한 넷플릭스 시리즈에 붙잡혀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다 오후를 또 날려버릴 공산이 크다. 나는 간편한 옷으로 재빨리 갈아입고 운동을 하러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오픈 전부터 내려와 닫힌 문 앞에서 서성대는 새벽잠 없는 노인들을 배려해 헬스장 앞에는 3인용 소파가 비치돼 있다. 오후에는 보통 비어 있는 그 자리에 오늘은 헬스장 트레이너 한 명과 중증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가 앉아 있다. 운동으로 단련된 젊은이의 튼실한 가슴에 폭 안겨 반쯤 눈을 감고 있는 할머니의 조막만 한 얼굴이 평화롭다. 걷기 운동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모양샌데 둘의 모습이 한 쌍의 연인 같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할머니의 귀에 대고 ‘안녕하세요’ 한다. 만날 때마다 시도해 보지만 오늘도 눈만 동그랗게 떴을 뿐 여전히 반응이 없다. 연신 오그라든 그녀의 손을 마사지하던 젊은이가 나를 향해 대신 빙그레 웃어준다.
손주뻘인 이 젊은이는 최근 운동팀에 새로 들어온 트레이너다. 첫 시간에 대학원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기에, 왕초보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인사말이 남달랐다. 앞으로 노년의 건강을 위한 운동을 함께 연구해 나가자고 말하는 게 아닌가. 잠시 머물다 논문 자료가 충족되면 미련 없이 훌쩍 떠나버리는 선생님들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는 기계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로 우리를 대했다. 대화를 나눌 때 우리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는 모습을 보면 타고난 품성이 살갑고 다정한 듯했다.
이 새내기 선생은 평일 오전마다 있는 ‘의자 체조’의 일부를 담당한다. 팔구십 대가 주를 이루는 30분짜리 프로그램으로, 지팡이를 짚거나 요양 보호사의 도움을 받고라도 일단 나와서 의자에 앉기만 하면 웬만큼 따라 할 수 있는 스트레칭 시간이다.
의자 체조가 진행되는 소강당 정면 단상에는 선생이 앉는 의자가 있고, 그 아래 홀에는 운동하기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회원이 앉을 의자가 놓여 있다. 맨 앞 의자 네 개는 평소 아무도 앉으려 하지 않는데 아마 선생과 빤히 마주 보는 자리라 모두 꺼려서 그럴 것이다. 선생의 입장도 마찬가지. 어르신을 코앞에서 내려다보려면 그들도 불편할 게 뻔하다. 하지만 청력에 문제가 있는 나 같은 위인은 앞자리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냉큼 맨 앞에 앉기가 멋쩍어 주뼛거리니 뒤에서 어느 분이 잘하는 사람이 앞에 앉아야 뒷사람이 따라 하기 좋다나 뭐라나 하며 나를 선생님 코앞에 앉혔다. 나야 못 이기는 척했지.
이 소강당 단상의 의자를 거쳐 간 선생은 내가 본 것만도 여러 명이었다. 누구나 처음 몇 주는 한결같이 실수를 연발하고 제풀에 피식 웃으며 어색해 쩔쩔맸다. 맨 앞에 앉아 있는 나로선 그 민망한 모습을 시시콜콜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의 새내기 선생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그 많은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단상 의자에 떡하니 앉아 숨죽이는 좌중을 쭉 둘러보고는 천진하게 활짝 웃었다. 우리도 덩달아 따라 웃으며 박수로 환영 인사를 대신했다.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일시에 사라졌다.
의자에 앉아서 하는 스트레칭 종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서 어느 선생이나 뻔한 동작을 가르치는데, 왜 유독 이 선생의 수업은 할머니들 사이에서 호감을 살까? 그의 친근한 외모와 부드러운 성품도 한몫했겠지만, 한 명 한 명 예의 주시하며 신체 조건이나 상태에 맞춰 각자가 선택할 수 있게 여러 버전의 동작을 알려주는 세심한 전문성이 더 큰 인기 요인인 것 같다. 조막만 한 얼굴의 그 치매 할머니 보호자가 운동 치료 담당을 이 젊은이로 바꾼 것은 신의 한 수다.
이제 충분히 휴식을 취했는지 선생이 할머니 손을 마주 잡고 사교춤 추듯 한 발 한 발 떼어 놓으며 헬스장으로 들어온다. 나는 하던 운동을 멈추고 그들의 뒤를 줄레줄레 따라간다. 바닥에서 한 발 떼기가 꼭 돌쟁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 같다. 하지만 선생은 재촉하지 않는다. 잘하신다고 추어올리며 스스로 걷기를 기다려줄 뿐. 나도 옆에서 한몫 거든다. ‘영차 영차’ 말뿐이지만.
이 할머니와 새내기 선생을 보면 왜 매번 내 가슴이 울컥하고 조여 오는지 모르겠다. 처연하게 아름다운 장면을 가까이에서 직관하는 느낌이랄까. 나라는 화상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 감동을 슬픔으로 느끼나 보다.
치매는 어두운 동굴에 들어가 여기가 어딘지, 내가 누군지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 아닐까? 그 쓸쓸하고 춥고 의미 없는 시간에 타인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일까? 조막 얼굴 할머니가 내게 대답해 줄 수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당신의 세상은 얼마나 적막한가요? 아니,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 궁금하지만 알고 싶지가 않다. 그저 이 특별한 선생님이 할머니의 어두운 시간에 아주 작은 빛으로라도 새어 들어가 주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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