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기업 ‘리와이어링’···조직과 의사결정 DNA 재설계 전쟁

노경은 기자 2026. 2. 1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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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임원 경영판단·AI 면접·산업 자동화까지···AI, 경영 중심축으로
/ 자료=고용노동부

[시사저널e=노경은 기자] 일본 굴지의 주류회사 기린홀딩스는 지난해 8월 마케팅·법무·재무 등 12개 분야의 전문 지식을 학습한 AI 가상 임원을 경영전략회의에 참여시키는 파격적 실험을 했다. AI 임원들은 과거 10년치 이사회 회의록과 최신 시장 데이터를 학습한 뒤 회의 도중 실시간으로 논점을 제시했다. 경영진이 간과하기 쉬운 ESG 리스크, 기후 변화에 따른 원료 조달 문제 등을 AI가 먼저 짚어내며 직관에 의존하던 경영 방식을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으로 재편했다는 평가다.

국내 기업 역시 AI를 업무 보조 수단이 아닌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시키는 단계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인사(HR)다. 롯데이노베이트를 비롯한 일부 롯데그룹 계열사는 신입사원 공개채용뿐 아니라 재직자 승진 과정에까지 AI 면접을 도입했다. 이른바 롯데의 AI 기반 승진 시험(GL 제도)으로, AI 면접관은 사람보다 답변 분석 과정에서 평가의 일관성과 공정성이 높다는 평가다. CJ그룹 일부 계열사와 GS그룹 계열사 GS리테일 등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AI 역량 검사를 도입했으며 무신사는 현재 진행 중인 신입사원 공개채용 평가 과정에서 자체 개발한 AI 평가 툴을 활용하고 있다.

실제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이 한달여 전인 지난해 12월 발표한 2025년 기업 채용동향조사에 따르면, 인사 업무에 AI 도구를 사용하는 기업은 전체 396개사 중 86.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조사는 매출액 기준 상위 500대 기업 인사담당자와 전국 청년 재직자 309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결과다.

12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기업이 AI를 바라보는 시선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문서 요약, 번역, 이메일 작성 등 업무 효율을 높이는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는데 그쳤다. 삼성전자는 2023년 12월부터 문서 요약과 번역, 이메일 작성을 지원하는 자체 생성형 AI 서비스 삼성가우스 포털을 내부에 도입했다. SK텔레콤의 에이닷엑스(A.X K1), LG의 챗엑사원, 롯데의 아이멤버, 포스코의 P-GPT 등도 유사한 형태다. 하지만 이제는 기업의 판단과 전략 수립 과정, 산업 현장의 생산성 향상에까지 AI가 깊숙이 개입하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 이른바 '리와이어링'이다.

생성형 AI를 사용하는 기업은 급증하며 단순 실험 단계를 넘어 실질적인 재무적 가치를 창출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McKinsey)는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서 AI 거버넌스를 CEO가 직접 이끄는 조직이 성과 차별화를 보였으며 AI 도입 그 자체보다 '워크플로우 재설계'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기존 업무 흐름을 그대로 유지하며 AI를 끼워넣는 방식이 아닌, AI 중심으로 조직을 재설계하는 기업들이 빠르게 이익(EBIT)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각 기업들, 잇따른 AI 신사업 전담 조직 신설

이에 기업들은 AI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조직 개편과 신설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모든 업무에 AI를 적용해 AI를 가장 잘 활용하고 성장하는 'AI 드리븐 컴퍼니(Driven Company)'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노태문 삼성전자 사장은 지난달 "전 업무 영역의 90%에 AI를 적용해 AI가 현장에서 판단하고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AI가 인력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임직원들이 업무 효율성과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AI를 상시 활용하겠다는 의미다.

전략 과제를 전담하는 조직 '이노엑스 랩'도 신설했다. 이노(innovation)와 엑스(X)라는 명칭에서 예측 가능하듯 이 조직은 미지의 영역을 향한 근본적 혁신을 목표로 한다. AI를 단지 제품 기능으로 넣는 것이 아니라 내부 생산성과 경쟁력 강화 인프라로 활용하겠다는 차원이다. 

​그동안의 비상시 조직이 문제 발생→TF 구성→단기 대응→종료라는 구조였다면, 이노엑스 랩은 지속적인 혁신 아이디어를 탐색하고 현실적인 솔루션을 만들어 전사에 퍼뜨리는 상설 조직이다. R&D와 전략, 마케팅, 기술 리더가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효과도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전사적 메가 과제 및 각 사업부의 도전적 전략 과제를 전담해 단기간 내 실질적인 성과를 창출하는 실행형 조직"이라고 설명했다.

2026년 사장단 인사의 주요 특징 역시 AI 드리븐 컴퍼니 전환을 가속화하기 위해 박홍근 하버드대 교수를 삼성전자 종합기술원(SAIT) 원장에, 윤장현 사장을 DX 부문 CTO에 과감히 보임한 점도 두드러진다. 이 관계자는 이를 두고 "AI 시대 기회 선점 기반을 마련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SK도 SK수펙스추구협의회 내에 AI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그룹은 AI위원회를 필두로 인공지능(AI) 관련 전후방 산업을 아우르는 비즈니스 포트폴리오 강화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SK는 산업계에서 AI 관련 생태계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비즈니스 구조를 갖춘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그룹 중 하나로 꼽힌다. AI위원회는 이 같은 강점을 극대화해 AI 산업 전반의 밸류체인(Value Chain)을 선점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핵심 사업 분야로는 AI 데이터센터(AIDC) 건설과 운영을 비롯해 전력 공급부터 생성·발전 등 전 단계에 걸친 인프라 구축과 사업화가 꼽힌다. SK는 단순 기술 개발을 넘어 설계·조달·시공(EPC)과 운영을 아우르는 종합 사업 모델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글로벌 AI 산업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SK 관계자는 "AI 산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커버할 수 있는 독보적인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다"며 "AI위원회를 중심으로 데이터센터 등 전후방 산업의 사업화 기회 포착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 움직이는 AI 디바이스를 만드는 회사로 이미 조직의 DNA를 바꾸는 단계다. AVP(Advanced Vehicle Platform) 본부를 신설해 기존 하드웨어 중심 R&D 조직을 소프트웨어와 AI 중심으로 통합했다. 포티투닷(42dot)과 협력해 차량을 하나의 거대한 AI 로봇으로 간주하는 SDV(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전략을 컨트롤타워로 삼았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와의 협업을 총괄하는 조직도 격상하고, 2028년까지 생산 현장에 인간형 로봇 아틀라스를 투입하기 위해 조직 내 AI 로보틱스 부문을 강화하고 있다.

서울의 한 경영학과 교수는 "리와이어링은 결국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조직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라며 "아직 국내 기업은 AI와 친해지는 단계이지만 조만간 단순히 업무 보조를 넘어 의사결정 구조와 비즈니스 인프라를 통째로 바꾸는 사례들이 다수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 이미지=챗GPT

◇산업 현장으로 확산되는 AI···생산·안전·품질까지 바꾼다

AI의 산업 현장 적용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은 지난해 2025 이천포럼 마무리 세션에서 AI와 디지털 전환(DT)의 체화를 강조하며, 구성원 모두가 AI를 신속하게 다루는 것이 SK의 차별화된 경쟁력 확보와 혁신의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최 회장은 "누가 더 빨리 대응하느냐 하는 변화의 속도가 기업 생존을 좌우한다"며 "구성원이 AI를 갖고 놀 수 있을 만큼 친숙하게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일선 산업 현장에서의 AI 활용 중요성을 강조한다.

SK그룹은 계열사 SK이노베이션이 석유화학 공장 내 열교환기 AI를 도입한 방식을 산업 현장에서 AI를 활용하는 대표사례로 꼽는다. 석유화학 공장에는 수많은 수만개의 열교환기가 설치돼 있고 이 교환기는 제품 생산 시 온도 조절에 쓰이는 수천여개 튜브로 구성돼 있다. 문제는 튜브가 손상된 채 열교환기가 운영되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사람이 일일이 초음파 사진을 찍고 육안으로 검사를 해왔다. 다만 이 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사람마다 판단이 달라질 수 있으며, 숙련된 전문가를 구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SK이노베이션은 지역 AI 기업 딥아이와 함께 AI 비파괴검사(IRIS) 자동평가 솔루션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AI가 초음파 데이터를 스스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정확도는 95% 이상, 속도는 검사시간을 90% 이상 줄여줬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이 기술은 산업통상자원부의 신기술인증(New Excellent Technology, NET인증)에도 선정됐다. SK이노베이션은 정부부처의 입증을 기반으로 정유·석유화학 산업뿐만 아니라 발전·배터리·철강 등 다양한 플랜트 및 산업현장, 글로벌 설비 진단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해 시간 및 비용절감, 생산성 향상 등에 이용될 방안을 계속 고민 중이다.

삼성전자는 'AI 일상 동반자' 시대를 본격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삼성전자는 모든 갤럭시 스마트폰, 4K 이상 프리미엄 TV, 와이파이 연결이 가능한 가전에 AI를 탑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모바일은 다양한 AI 서비스를 연결하는 AI 허브로 진화하는 셈이다.

업계에서는 향후 산업 환경과 경영 판단 전반에서 AI 활용이 더욱 넓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인공지능협회 관계자는 "아직 국내 기업들은 AI와 친해지는 단계"라면서도 "리와이어링은 단순히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메우는 수준을 넘어, 인간보다 정확한 AI의 판단력을 경영 핵심 엔진으로 장착하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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